<다중위기 속 노동운동의 길 토론회> 참관기:
‘축소사회’를 넘어 ‘적정사회’를 향해
조건준 아유(아무나유니언) 대표
굵직했다. 지난 10월 24일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주최한 김금수 선생 2주기 추모 토론회 <다중위기 속 노동운동의 길> 토론회는 ‘디지털 전환과 노조의 대응과제’ ‘기후위기와 일의 세계’ ‘인구구조 변화와 대응 방향: 압축 성장에서 축소사회로’ 등 다중위기를 강렬하게 상징하는 주제를 다뤘다. 각각의 주제가 만만치 않은데, 이를 한방에 깊고 간결하게 다루는 자리는 흔치 않다.
“기술로 인한 대량실업은 입증되지 않는다”
이문호 박사(고대 노동문제연구소)는 디지털 전환이 고용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와 데이터들이 각국에서 쏟아져 나왔지만, 고용의 ‘공포 시나리오’는 점점 수그러들었음을 보여주었다. 그렇다고 낙관적인 시나리오대로 미래가 전개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분명한 것은 “파괴적 시나리오(기술적 대량실업)는 경험적으로 입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동계는 총고용보다는 구조적 변화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디지털 전환으로 총고용에는 큰 변화가 없다. 대신 직업 또는 직무의 이동이 많아지고, 플랫폼 노동 등 새로운 고용형태의 등장으로 노동시장의 분절화가 더욱 심화하고 있다”는 것.
노조에게 고용은 줄어드는데 기술혁신을 무조건 반대하기 어려운 딜레마적 상황이 있다. 이중전략이 필요하다. 노동을 보호하는 것과 디지털 프로세스를 규제하는 것, 참여하는 것과 혁신적 전환 정책을 개발하는 것이다.
“기후위기와 인간적인 노동체제의 연관성”
왜 노동연구자가 기후위기를 다루냐는 질문을 자주 접한다는 이정희 박사(한국노동연구원)는 폭염 속에 쓰러지는 노동자와 기후재난이 들춰낸 불평등의 민낯을 지적하면서 정부의 탄소중립 정책을 비판적으로 보여주었다.
대응 방향으로서 적응과 완화, 그리고 구조개혁을 들었다. 적응은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산업안전보건 관련 법령을 개정하고 단체협약에도 관련 내용을 담는 것이다. 완화는 기후위기를 완화하기 위한 재생에너지 사용 확대 등과 사내식당 ‘저탄소의 날’을 비롯한 일상적 실천이다. 구조개혁은 회색일자리를 녹색일자리로 바꾸는 것이다.
이제 노동자는 생산자이자 소비자이며 공동체의 시민으로서 무엇을, 어떻게, 왜 생산할 것인지 일의 세계에 새로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실현되지 못한 루카스 항공의 사례는 너무 낭만적인 생각이 아니냐는 질문도 있었지만, 이 박사는 “진정으로 인간적인 노동체제”를 강조했다.
회색에서 녹색일자리로 전환을 말하는 영국의 산업, 직업, 기업적 접근 방식을 보면서 경제적 수준을 넘어선 사회적 차원의 접근 없이 기후위기를 제대로 다룰 수 있을까. 토론에서 나온 대로 기후위기를 여전히 노동의 시각으로 접근해야 하는가를 생각했다.
“인구감소는 해결보다는 관리의 문제”
통계에 일가견이 있는 김유선 이사장(한국노동사회연구소)은 저출산의 인구구조 변화에 대한 통계를 보여주고 다양한 연구 결과들을 종합해서 소개했다. 인구감소는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 관리해야 한다는 주장, 저출산 대응방안으로 탈성장을 제시한 연구도 있구나 싶었다. 인구감소에 대한 짧고 간결한 종합 전시장을 둘러보는 느낌이었는데 탈성장 언급이 눈에 띄었다.
나는 첫 번째 질문자로 탈성장은 선택이 아니라 다가온 현실인가에 대해 김 이사장에게 물었다. 그는 “나는 탈성장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인구감소와 저성장, 마이너스 성장이 표준이 될 것이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패러다임 전환은 불가피하다”고 했다. 마이너스 성장은 노동운동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고, 불확실성도 증가할 것이다. 물론 김 이사장은 “구조개혁을 통해 삶의 질을 개선한다면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빠뜨리지 않았다.
“융합적 노동운동 네트워크”
저녁 일정 때문에 토론 중간에 자리를 떴다. 오늘 다룬 주제는 이 시대에 반드시 마주해야 할 과제다. 뒤풀이까지 참석해서 더 많은 토론을 하고 싶었지만 아쉬움을 뒤로 하고 생각했다. 세 발표 모두 연결해 생각해보면 떠오르는 것은 ‘사회의 재발견’이다.
고색창연한 산별노조가 어쩌고 하는 얘기는 관심 없다. 산별노조와 정치세력화라는 양날개론은 유럽에서 가져온 수입품인데, 그 중 하나의 날개인 산별노조를 30년이나 우려먹었으면 이제 그만 할 때가 아닐까. 비임금노동이 증가하고 있는 노동시장에서 낡은 산별노조론은 아무런 효능감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이문호 박사는 “융합과학적 노동운동 네트워크”를 언급했다. 디지털 전환은 자연과학과 이공계 및 인문사회과학이 결합한 이른바 ‘융합과학’의 산출물이라고 했다. 이에 대응하는 노동운동도 융합과학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AI가 판치는 디지털 시대에 내셔널센터는 새롭게 재구축되어야 하지 않을까. 과거에도 민주노조운동은 생산현장과 사회가 맞물려 새로운 질을 창출하는 사건이었고 당시에 노조와 사회단체는 구분되지 않고 하나가 되어 민주노조와 노동계급을 사회에 떠오르게 했다.
‘경제적 접근’만이 아닌 ‘사회적 접근’의 중요성
“임단협은 먹고사는 문제지만, 기후위기는 죽고 사는 문제다.” 1~2년 전쯤으로 기억하는데, 현장 간부가 노조 홍보물에 이렇게 쓴 것을 보았다. 강렬한 문구였고, 오히려 과감하게 접근법을 달리하는 것이 훨씬 더 강렬한 설득력을 가진 것으로 보였다.
아니면 늘 우리는 기후위기로 내일 죽을지 모르지만, 일자리를 잃으면 오늘 죽는다는 식의 ‘먹고사니즘’에 허덕이면서 ‘죽고 사는 문제’를 외면하다가 파국을 맞을 테니까. 경제와 산업에 납작하게 들러붙은 모양으로는 희망을 발견하기 어렵다. 그래서 사회적 접근과 사회의 재발견은 매우 중요한 것 아닌가.
김유선 이사장의 얘기처럼, 축소사회는 이미 다가와 있다. 탈성장에 동의하냐 마냐를 떠나서 마이너스 성장은 다가왔다. 기술에 환장한 사람들은 엄청난 기술이 우리를 다시 성장의 희망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떠들며 성장중독증을 드러내지만, 별 가능성 없는 얘기다. 여러 데이터가 보여주듯, 이미 때는 왔고 막을 수 없다. 문제는 어떻게 관리하고 대응하는가다.
압축성장은 가고 축소사회가 다가온다. 그런데 축소사회라는 표현이 좀 걸렸다. 인구감소로 인한 경제성장이 꺾이고 있으며 앞으로는 마이너스 성장이 올 것이라는 전망에 공감한다. 그런데 왜 이것을 축소사회로 표현해야 할까.
‘적정사회’를 향해
자본주의가 시작된 이래 경제가 사회를 삼켜버린 상황에서 경제가 저성장이나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서기에 인구감소 등으로 사회가 축소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를 삼켜버린 경제주의적인 사고가 아닌가. 경제가 곧 사회인가. 사회를 단순히 재화나 인구의 양으로 평가해야 할까.
숱하게 경험한 기업의 구조조정 때도 동료애가 강하고 노조가 탄탄하면 ‘함께 살자’로 흘렀고, 생존경쟁만 강하고 노조도 엉망이면 ‘너 죽고 나 살자’였다. 마이너스 성장 속에서도 사회가 약하면 다가오는 것은 먹고사니즘에 빠져서 아비규환(이미 세계는 전쟁 중)이 계속될 것이다.
필리핀 가사노동자를 둘러싼 논쟁처럼, 인구축소에 이주노동자를 늘리겠다는 자본의 욕망은 솟구칠 것이고 유럽과 미국이 보여주듯 외국인 혐오를 앞세운 극우정치가 꿈틀 댈 것이다. 다정한 사회가 탄탄하게 구축될 때, 질적으로 사회가 강화될 때에 갈등을 넘어서 경제적 축소에 적절한 ‘적정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사회의 재발견’이 필요하다
그래서 다중위기 속에서 중요한 것은 사회 그 자체다. 청년 활동가 프로그램에 참가해 경제는 돈이 흐르는 관계라면 사회는 정, 애정, 우정, 다정함이 흐르는 관계들의 앙상블이라는 취지로 강의를 했다.
강의 중 한 노동연구자가 청년들이 싫어하는 단어 중의 하나가 사회라고 했다는 점을 거론했다. 이에 대해 청년은 “청년들이 사회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청년들이 사회를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청년만이 아니라 모두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냐”고 했다.
맞는 말이다. 토론회를 떠나오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 다시 솟아나는 생각은 이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의미도 개념도 새롭게 다가오고 있으며 무엇보다 절실한 ‘사회의 재발견’!
출처: <e노동사회> 2024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