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다시 밀양으로 가야 한다

노동사회

우리는 다시 밀양으로 가야 한다

구도희 0 4,282 2014.01.03 05:27
 
2013년 10월 송전탑 공사가 재개된 후 밀양은 사실상 계엄령 상태에 들어갔다. 경찰 3천여 명이 마을과 공사현장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막아선 채 밀양주민들에게 달라붙어 주민들을 연행하고, 폭력을 저지르는 상황이 일상적으로 일어났다. 매일매일이 전쟁터였고, 악다구니였고, 슬픔과 분노였다. 여든이 넘은 할매․할배들을 가로막기 위한 경찰들의 벽은 넓고 견고했으며 무지막지했다. 비아냥거림과 모멸감, 그리고 억울함과 무기력감을 견뎌내야 했던 시간들이었다. 밀양주민과 송전탑건설 백지화를 요구하는 이들에게 인권이나 민주주의는 너무나 먼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쌍용차해고자인 내가 겪어야 했던 지난 5년 동안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았다. 움직이기만 하면 이유를 불문하고 붙잡히고, 항의하면 공무집행방해로 연행되고, 저항하면 순식간에 가해지던 폭력들과 다르지 않았다. 국가공권력은 비단 쌍용차해고자들 뿐만 아니라 쫓겨나고 배제되었지만 맞서 싸우는 이들에게 불온한 딱지를 붙이고, 아주 정당한 듯 폭력을 행사했다. 용산에서, 강정에서, 대한문에서, 저항하는 곳곳에서 그런 공권력의 사적폭력이 횡행했다. 
 
우리 모두의 문제인 밀양 송전탑 문제
내가 밀양 할매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누가 죽어서 송전탑공사를 막아낼 수 있다면 살아갈 날 얼마 남지 않은 우리들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떤 열의나 비통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지난 8년간의 싸움에서 체득된 자연스러운 한숨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정리해고로 인해 24명의 동료들과 가족들을 떠나보냈던 내게 그 한숨 같은 말들은 비수였다. 그래서 ‘안 됩니다. 내 앞에서 그런 이야기 꺼내지 마세요. 왜 죽습니까. 살아서 꼭 이깁시다’ 라는 말은 섣불리 꺼내지 못했다. 삶이 고통인 이들에게 그런 지나가는 말들은 하등 위로가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반드시 송전탑 공사를 막겠다고 주문처럼 이야기하는 할매들에게 희망이 있음을 이야기 하고 싶었다. 밀양 송전탑 문제가 촌에 사는 할매․할배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임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래서 밀양 할매․할배들이 굳건하게 싸워 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한진중공업·현대차 비정규직·쌍용차·장기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이 밀양으로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절망과 무기력감 속에서도 희망을 위해 싸웠던 사람들, 죽음과 고립 속에서도 살기 위해 몸부림쳤던 사람들이었다. 용산참사 유가족들, 강정마을 주민들, 강원도 홍천 골프장 반대주민들, 청도 삼평리 송전탑공사 반대주민들, 학생들, 성직자, 성소수자들도 밀양으로 가는 희망버스에 탑승하겠노라고 이야기했다. 희망버스는 쫓겨나고 배제됐지만 삶을 걸고 싸워나가는 이들과 함께 출발했다. 그렇게 각기 다른 삶의 궤적에 서있지만 밀양의 싸움이 우리 모두의 싸움임을 믿는 이들이 전국 26개 지역에서 희망을 품고 출발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희망을 만들 수 있을지, 우리가 향하는 발걸음이 희망이 될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희망버스가 가는 길목마다 딱지처럼 붙는 외부세력·절망버스라는 수식어를 넘을 수 있을지, 지난 8년 동안 싸워왔던 밀양 할매․할배들의 삶에 다시 용기를 줄 수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우리가 확신해도 좋을지 우리 스스로도 조심스러웠다. 다만 우리의 마음이 그곳에 가고 싶었다. 우리 모두는 맞서 싸우는 할매․할배들이 옳다고 이야기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경찰들의 넓고 견고하며 무지막지한 벽을 반드시 넘어 밀양 송전탑 공사현장에서 공사를 중단하라는 우리의 외침이 다른 이들에게 들리기를 희망했다.
 
<밀양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2013년 12월1일 볏단 조형물 앞에서 행사 마무리 집회  중이다. ©환경운동연합>
 
희망을 만들기 위해 떠나는 버스
11월30일은 화창했다. 겨울로 가는 길목이긴 했지만 구름 한 점 없는 파아란 하늘이었다. 밀양희망버스를 타고 나서야 우리는 서로에게 밀양에 가야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이야기 할 수 있었다. 누군가는 서울에 사는 자신들이 쓰는 전기 때문에 밀양주민들이 힘들게 싸우는 것이라며 빚을 갚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다른 누군가는 밀양주민들이 겪는 공권력의 폭력에 함께 맞서 싸우기 위해 간다고 이야기했다. 또 다른 이들은 영상에서만 보던 현장을 가보고 싶고, 핵 없는 세상을 위해서라고, 도울 일이 있으면 작은 힘이라도 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수많은 마음들을 통해 밀양의 문제가 우리 모두의 문제임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누가 가자고 종용해서 억지로 향하는 것이 아닌 수많은 개인들이, 수많은 저마다의 이유를 가지고 밀양으로 향했다. 이들이 토해놓은 저마다의 사연과 아픔들은 즐겁고도 유쾌하게, 거대한 이야기들을 이루었다. 사실 나는 희망은 본디 조직이나 지침, 기획이나 이벤트가 아닌 그렇게 마음을 모아가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 믿었다. 
밀양은 아름다웠다. 또 너무나도 평화로웠다. 시내를 잠시 벗어나자 온통 산과 들이었다. 그 산과 들 틈에 그림 같은 집들이 부락을 이루며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이렇게 아름답고 평화로운 삶의 터전에 높이가 100m나 되는 초고압 송전탑이 52개나 들어선다는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리고 밀양에 건설되는 송전탑이 밀양지역 4개면에 해당하는 넓은 지역을 관통하고, 송전탑이 들어서는 예정지가 주민들이 사는 마을과 그렇게 가까운지 기실 우리는 너무나 몰랐었다. 
 
송전탑 공사현장 앞에 선 참가자와 주민들 ‘울다 웃다’
보라색의 송전탑 공사 반대 조끼를 입고 우리를 맞은 밀양 할매․할배들은 선하디 선한 표정으로 와줘서 고맙다며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리는 굳은 표정의 할매․할배들과 함께 사람을 내쫓고 산을 마구 파헤치는 송전탑 공사현장으로 향했다. 할매․할배들은 10월 이후로 경찰들이 막아서 단 한 번도 현장에 가보지 못했다며 우리를 이끌었다. 
그러나 우리를 기다리는 건 길게 늘어서 있는 경찰들이었다. 경찰들이 막아섰지만 우리는 포기하지도, 물러서지도 않고 공사현장으로 향했다. 몇 시간을 산 위에서 소리치고 항의하며, 넘어지고 구르면서 마침내 공사현장에 도착했다. 포클레인으로 파헤쳐 놓은 공사현장에 도착한 주민들은 이내 눈물을 보이기도 하고, 흥에 겨워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파헤쳐진 공사현장을 망가뜨린 것도 아니고, 현장에 함께 왔다는 것만으로 우리 모두는 감격스러웠다. 
공사를 중단하지 않으면 다시 오겠노라고, 다음에 올 때는 더 많은 이들과 오겠노라고, 송전탑공사가 백지화 될 때 까지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밀양 할매․할배들의 손을 놓지 않겠노라 우리는 함께 선언했다. 낭패한 기색의 경찰들과 한전 직원들을 뒤로 한 채 우리는 다시 밀양역으로 모였다.
 
희망버스 참가자들 희망의 축제를 만들다
전국에서 희망버스를 타고 온 이들 뿐만 아니라, 창원에서 밀양까지 자전거를 타며 밀양의 싸움을 알렸던 노동자들, 울산에서 밀양까지 걸어왔던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 개인차량과 기차를 타고 온 수많은 시민들이 밀양역을 가득 메웠다. 
참가자들은 밀양시민단체에서 준비한 음식, 전주시민들이 가져온 765개의 떡과 희망버스 기획단이 준비한 국밥, 투쟁하는 곳이라면 내달리는 ‘토닥토닥 밥차’가 준비한 음식으로 저녁식사를 함께 나눴다. 뿐만 아니라 한국작가회의에서 준비한 책, 밀양투쟁 사진의 엽서, 밀양주민들이 직접 재배한 농산물을 구입하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 또한 전국 각지에서 모금된 성금이 밀양 주민들에게 전달됐다. 파견미술팀은 3박4일 동안 밤낮을 잊으며 ‘밀양의 얼굴들’이라는 상징미술품을 만들어주었다. 
밀양역에서 두 시간 동안 펼쳐진 문화제는 거대한 축제와 같았다. 백기완 선생님을 비롯해서 밀양 할매들의 이야기와 공연, 용산·강정·강원도 골프장 반대주민·청도 삼평리 주민들·투쟁사업장 노동자들·밀양대책위 김준환 신부님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모두가 밀양임을, 싸우는 우리 모두가 희망임을 노래했다. 그리고 밀양 송전탑 예정지 마을에 흩어져서 춥지만 마음 따뜻한 밤을 함께 보냈다. 
 
      
<밀양 희망버스 참가자들과 지역 주민들이 11월30일 밀양역 앞에서 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향린교회>
 
“우리는 다시 밀양으로 가야 한다”
다음날 12월1일 아침 우리는 보라마을에 함께 모였다. 대한문이 쌍용차 해고자들에게 상처를 내보이고 치유하는 공간이었다면, 보라마을은 우리에게 밀양을 내보인 가슴 먹먹한 곳이었다. 우리는 고(故) 이치우 어르신이 송전탑 공사를 반대하며 분신한 곳에서 우리의 마음을 서로 맞대기 위해 모였다. 밀양에서의 밤을 함께 보낸 희망버스 탑승객들은 다시 돌아 올 것을 약속하며, 떨어지는 눈물을 훔치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며 다시 자신이 딛고 서야 할 자리로 돌아갔다.  
한전에서 계획한 밀양 송전탑 예정지는 총 52곳으로, 한전은 크기가 100미터가 넘는 76만5천 볼트의 초고압 송전탑을 건설하고 있다. 고압 송전탑이 지나가면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해버린다. 백혈병이나 암과 같은 심각한 질병을 유발하는 것 외에도 사람들이 모여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밀양 할매․할배들은 싸움을 그만 둘 수 없다고 한다. 이 땅에서 살아갈 후손들에게 자신들의 싸움을 물려 줄 수는 없다고, 자신들이 꼭 해결하겠다고 간절하게 호소한다. 밀양 송전탑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 전체 공정의 10분의 1 정도밖에 진행되지 않았으며, 몇몇 공사 지역을 제외하고는 아직 기초공사 중이다. 또한 52개의 송전탑이 다 건설될 때까지 전기는 결코 흐르지 못한다. 
그래서 밀양의 싸움은 송전탑이 다 건설될 때까지 시간과의 싸움이다. 그 시간은 밀양 할매 ․할배들이 결코 포기하지 않을 시간이고, 이 싸움을 우리가 어떻게 지속하고 연대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다. 또한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밀양주민들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우리가 목 놓아 외쳤던 것처럼 우리 모두가 밀양이어야 할 시간이다. 우리가 밀양으로 향했던 시간은 이후 밀양 싸움의 어디쯤에 놓일 수 있을까. 우리들의 삶에서 밀양은 어디쯤에 놓여 있을까. 아직 밀양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다시 밀양으로 가야 한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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