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없는 세월이라 했던가, 새해 인사를 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두 달도 한참 지나 봄내음이 눈 앞에 있다. 그런데 갈수록 훈훈해져야 할 봄의 문턱에서 왜 이리 차가우냐고 많은 사람들이 아우성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보편적인 잣대는 역시 삶의 조건과 민주적인 자유, 권리의 보장 문제 때문일 것이다. 출범 1년째인 박근혜 정부는 법과 원칙에 따라 착실하게 ‘비정상의 정상화’를 이룩해가고 있고 창조경제의 위력이 힘을 발휘할 것이라 장담하지만, 실망과 비탄의 소리 또한 만만치 않다. 그에 따라 사회적 대립과 갈등은 어느 때보다 첨예하여 박근혜 대통령이 공약한 ‘국민행복’과 ‘국민대통합’이 균열을 넘어 파열구를 내며 무너지고 있다는 문제 제기에 갈수록 무게가 실리고 있다.
대자본 주도의 경제성장 위한 제왕적 권위주의 통치
박근혜 정부는 대선 공약이었던 경제민주화와 복지확충 등을 통한 국민행복과 국민대통합을 국정지표로 내세우며 출범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우리 사회가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시대적 의제로 제기했던 이들 과제를 근본부터 수정하거나 폐기했다. 표면상 이유는 재정 부족과 ‘경제살리기’지만 그 속내는 대재벌 주도의 양적인 경제성장 전략이었다. 정부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 대기업이 주도하는 수출 의존적 경제성장을 필요충분조건으로 내세우며 줄푸세, 규제완화, 공기업 사영화(私營化) 등을 정책수단으로 동원했다. 가스, 수도, 병원의 사영화 추진은 정부의 성장전략으로 정해진 순서를 밟을 것이다. 이 같은 거대독점자본 중심의 양적 성장을 정부 정책의 중심에 두는 한 경제민주화는 후퇴하기 마련이다. 또한 소득분배의 개선이나 복지 확충과 같은 대선 공약은 백지화되거나 제한적으로만 허용될 수밖에 없다.
정부는 여기에 요구되는 정치 전략으로 강력한 리더십을 설정했고, 상명하달의 권위주의 체제와 수평적 쌍방 의사소통을 거부하는 제왕적 카리스마의 정치 행태가 한해 내내 이어졌다. 정당정치 ․ 의회정치는 형해화(形骸化)되고 집권당은 대통령의 언급을 복습하는 앵무새․돌격대의 범주에 머물렀다. 정부 정책을 반대만 하는 야당은 장애물 같은 집단으로 취급되었고 실제로 무기력했다. 정부가 국정원을 비롯한 국가 권력기관의 전면적 선거개입을 부인하고 진실규명을 위한 모든 움직임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차단한 것이나, 비판․반대세력을 ‘대선불복종’이나 ‘종북세력’으로 몰아붙이고 심지어 진보정당 해산까지 청구한 것은 제왕적 행태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또한 일본의 우경화를 비난하면서 식민지 근대화론을 인정하는 국사교과서 왜곡 문제를 보고 있노라면 민족적 정통성마저 훼손시키는 수구보수권력의 횡포를 실감케 한다. 반면 보수 언론매체가 칭송해 마지않는 대통령의 순방외교나 한중․한일관계 그리고 민족의 숙원인 통일과 관련한 ‘대박론’은 대자본의 이익증대를 위한 경제활동이자 미국의 세계전략 변화에 상응하는 것일 뿐 정부의 새로운 독자적 전략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간간이 터져나오는 과오로 인해 집권 1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국민들에게 세 차례나 사과했지만, 개선의 의지나 전망을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음으로써 민심의 이반을 붙잡을 진정성을 보여주지 못했다.
결국 박근혜 정부의 한 해는 윤진호 인하대학교 교수가 진단한 것처럼, 제왕적 권위주의라는 통치수단을 동원해 석양으로 기우는 신자유주의․시장주의․경쟁주의를 바탕으로 대재벌 중심의 양적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가 강조해 마지않는 ‘법과 원칙’, ‘비상식의 상식화’는 이런 기조를 관철하기 위한 실천적 명제이며, 저항세력의 소리가 높아질수록 이 명제들은 훨씬 강한 톤으로 강조되었다.
노동정책 한계에 따른 노사관계의 빙하시대
박근혜 정부의 이 같은 전략은 노동분야에도 예외없이 관철되었다. 당초부터 노동분야 정책은 ‘일자리 늘지오’로 집약되는 노동시장 정책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노사관계 정책은 사회적 대화와 불합리한 제도개선이라는 극히 간략한 내용에 머물렀다. 이는 고용확대에 전력을 기울이는 대신 노사관계는 상대적으로 비중을 덜 두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고용률 70% 달성’으로 집약되는 고용정책은 과거에 비해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되었으나, 실상은 일자리 만을 늘려 실업을 줄인다는 양적 증대를 기본으로 한 것이었다. 더욱이 고용증대에는 대부분 노동의 유연화가 결합되어 있어서 고용안정이나 임금, 노동조건, 노사관계 발전 같은 질적 개선은 부차적이거나 지엽적인 것으로 치부되기 마련이었다. 불법파견에 대한 특별 근로감독이나 쌍용자동차 대량 해고 진상규명에 대한 국정조사 약속은 당초부터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이고,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총회에 보낸 우호적 인사말도 공치사일 수밖에 없었다. 장기투쟁 노동자들의 처절한 요구를 외면한 것은 박근혜 정부의 성격에 비추어 볼 때 어쩌면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볼 수 있는 행태였다.
그토록 강조했던 노동시장 정책이 갈수록 한계를 드러내는 상황에서 노사관계는 ‘빙하시대’를 연상케 하는 살벌한 정경을 연출했다. 박근혜 정부는 배제와 편입이라는 전통적인 분할통치전략을 구사하고자 했다. 한국노총은 사회적 대화의 상대로서 국정운영의 파트너로 삼는 한편 민주노총은 철저하게 배제하는 식이었다. 극소수의 해고자 조합원을 핑계 삼아 전국공무원노동조합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설립신고를 반려하고 심지어 ‘노조아님’ 통보 조치로 퇴출시키는 일이나, 사영화에 맞선 철도노조의 총파업을 불법으로 몰아붙이고 민주노총에 경찰을 투입시킨 일은 어쩌면 예정된 수순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분할통치 전략은 한국노총이 민주노총과 연대하여 공공기관의 합리화정책에 강하게 반발하고, 민주노총 침탈에 항의하여 정책참여를 거부함으로써 장애에 부닥쳤다. 이 전략의 모순은 대통령 스스로 공공기관의 방만 경영이 노조의 횡포에 못이긴 특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강하게 비난함으로써 더욱 심화되었다.
노동정책 후퇴에 맞선 목숨 건 노동자 투쟁
노동자들은 박근혜 정부의 공약 훼손과 경제정책에 밀린 노동정책의 후퇴에 대해 극한적인 방법으로 맞섰다. 노동자들은 151~296일에 이르는 장기간 동안 혹독한 추위와 더위, 공포에 맞서 목숨을 걸고 11건의 굴뚝, 철탑, 종탑 농성을 벌였다. 그리고 2013년 초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노동자의 24번째 죽음이 알려진 이래, 지난 한 해 목숨을 버린 노동자는 삼성전자서비스 최종범 열사에 이르기까지 19명이나 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사내하청을 포함한 비정규직, 정리해고자들이거나 과중한 업무에 짓눌린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이 요구한 것은 비정규직 철폐, 정리해고와 휴직으로 인한 생활고 해결, 노동탄압의 중단 등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절박한 현장 노동자들의 요구는 철저하게 외면하거나 법과 원칙을 내세워 저항을 차단하려 했다. 이 사이 사용자들은 노조파괴와 교묘한 부당노동행위를 자행했고, 1,128억 여원의 손배청구와 168억 여원의 가압류로 노동기본권의 혈맥을 근원적으로 차단해버렸다.
물론 이러한 노동상황에 대해 지배세력 내부의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몇몇 사법부의 판결, 예컨대 노동부의 전교조에 대한 노조아님 통보의 효력을 정지시킨 지난해 11월13일 서울행정법원의 판결, 언론노조 문화방송지부의 2012년 공정방송 요구파업을 정당하다고 한 올해 1월17일 서울남부지방법원의 판결, 2009년 쌍용자동차 불법 정리해고에 대한 2월7일 서울고등법원의 판결 등이 그것이었다. 이는 파행적이고 불법적인 정부와 사용자의 횡포에 도전한 것으로, 거대기업들의 사내하청에 대한 불법파견 판결과 함께 노사관계의 대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중요한 판결로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통상임금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나 사용자들에 의한 거액의 손배청구와 가압류를 인정한 판결들이 연이어 나옴으로써 자본 편향의 보수적 성향은 여실히 온존되고 있다.
노동운동 변화의 가늠자 될 국민총파업
민주노총은 박근혜 정부 출범일인 2월 25일 ‘국민총파업’을 선언했다. 그 직접적인 계기는 민주노총에 대한 지난해 12월22일의 경찰 침탈이다. 민주노총은 경찰의 침탈을 민주노조운동의 근거지를 직접 타격함으로써 노동운동의 근본을 파괴하기 위한 국가권력의 의도적인 폭력으로 보고 있다. 이는 권위주의 정권의 법과 원칙의 적용이나 비정상의 정상화를 명분으로 한 일방통행식 속성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의 위기의식과 초조감을 표출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집권 1년도 안 되어 들불처럼 번져가는 대통령 퇴진 요구는 그 증좌다. 천주교 사제, 신도들의 연이은 시국기도회와 시도 때도 없는 촛불시위, 학원가와 영세상인들의 절박한 몸부림에 대해 정부는 이렇다 할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민주주의 후퇴와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가시적인 문제제기와 갈수록 각박해지는 서민의 삶의 문제들이 정부의 위기감을 증폭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권위주의 지배권력으로서는 저항세력의 한 중심축인 민주노총을 공격하여 위기의식 확산을 차단하는 것은 달콤한 유혹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민주노총이 파업 구호로 ‘박근혜 정권 1년! 이대로는 못살겠다! 2.25 국민파업’을 내세운 배경이다. ‘못살겠다’고 터져나오는 국민적 투쟁열기를 하나의 힘으로 끌어모아 박근혜 정권을 끝장내거나, 근본적인 위기를 조성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민주노총이 박근혜 정부와의 정면대결을 선언하게 만든 것은 역설적으로 박근혜 정부 자신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민주노총이 자신감을 갖게 만든 변화들도 있다. 민주노총 지도부의 정비와 조직혁신의 추진, 노조 조직률의 회복 조짐, 무노조왕국 신화를 위협하는 신규조직화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조직적인 단체교섭의 진전, 희망버스와 같은 시민사회 운동 등은 현장 조합원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현상들이었다. 이들 변화는 지난해 11월 10일 열린 민주노총의 전국노동자대회와 한국노총까지 합세한 12월28일 서울광장 10만 집회의 열기로 나타났다.
민주노총은 이러한 조직 안팎의 상황 변화를 배경으로, 이번 국민총파업의 목표를 박근혜 정권의 퇴진에 두고 23개 요구 조건을 내세웠다. 2.25 파업이 위력적으로 성사될 때 상반기 반박근혜․박근혜 퇴진 투쟁의 전국화, 5월 반박근혜 총궐기 투쟁과 6.4 지방선거 승리, 2․3차 국민총파업으로 흐름이 이어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의 저항투쟁은 필연이다. 그 투쟁은 오랫동안 쌓아온 조직역량의 표출이며 향후 노동운동 변화의 가늠자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검토되어야 한다. 투쟁전략과 목표는 제대로 설정되었는가, 요구 조건은 전략목표에 맞게 배치되었는가, 이번 파업투쟁의 성격은 어떤 것이며 다음 투쟁과 어떤 경로로 연결될 수 있는가, 계획은 민주적 절차에 의해 결정되었는가, 교육․선전․홍보 등 현장 동력의 지지와 참여를 위한 준비는 철저했는가, 정세에 걸맞는 다양하고도 유연한 전술이 구사되었는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통일은 어느 정도 이루어질 수 있는가, 투쟁의 지도력은 제대로 발휘되었는가, 연대 동맹세력들의 엄호와 지원은 충분히 가동되었는가 등이다.
투쟁은 목표를 쟁취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러나 투쟁은 한 번에 그치는 것이 아닌 한, 조직과 이념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조직 안에 녹슨 모순과 잘못된 작풍을 청산하고 개선함으로써 노동운동을 한 걸음 발전시키는 것이 본연의 과제라는 것이다. 어쩌면 민주노총의 이번 투쟁은 여기에 방점을 두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침체의 늪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노동운동이 도약의 전기를 마련하고 자본 주도의 파행으로 뒷걸음치고 있는 노사관계의 정상화에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