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특수고용노동자이기 때문이다
“퀵 하는 사람들도 이 나라 국민이잖아요. 자기 신체 수탈해가면서 정당하게 일하고 있는데, 너무나도 당하고 있고, 법적으로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 10년 넘게 이 일을 해왔지만 이건 아니다 싶어요.” (퀵서비스기사)
양용민 씨는 15년차 베테랑 퀵서비스기사다. 그는 자기 직업에 자부심이 있다. 퀵서비스기사는 “이 나라 물류의 모세혈관”으로 기능하고, “누구 등쳐먹지 않고 스스로 땀 흘린 만큼만 벌어가는” 정직한 직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일에 종사하는 이들은 가난하다.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해도 가난하다. 2000년대 중후반 어느 조사에 따르면 퀵서비스기사가 한 달간 일해서 이것저것 비용을 제하고 집에 가져가는 돈은 평균 130만 원 정도다. 지금이라고 크게 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면 몸이 망가진다. 웬만한 기사들은 일 년에 한 차례 이상 겪는 교통사고도 두려운 일이지만, 꽉 막힌 도심을 달리며 들이마시는 매연도 심각한 문제다. 퀵서비스기사는 이산화질소에 대한 노출 정도가 가장 심한 직업이다. 각종 폐 질환과 호흡기 질환, 남성 불임 등을 겪을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매우 높다.
이러한 노동조건은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 정직하게 수입을 얻고 있다는 자부심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든다. “자기 신체 수탈”에 가까운 노력의 대가가 벗어나기 힘든 가난과 질병이라면, 자기 존엄성에 대한 “정당한” 욕망은 상처 입을 수밖에 없다. 나아가 이러한 상처를 만들어내는 구조적 조건과 과정이 저 높은 곳에 있는 시장논리의 이름으로 합리화된다면, 그리하여 보편적인 법제도적 보호조차도 이들을 배제하고 있다면, “이건 아니다 싶”을 수밖에 없다. 국민연금, 건강보험, 산재보험, 고용보험 등 이른바 4대 보험은 노동자라면 누구나 누려야 하는 최소한의 제도적 안전망이다. 그러나 퀵서비스기사들에게 산재보험 가입이 허용된 것은 2012년이다. 이들이 이른바 ‘특수고용노동자’이기 때문이다.
법 앞에서 특수한, 사회적으로 보편적인
특수고용노동자는 누구인가? 일반적인 자영업자와는 달리 자기 점포나 작업장 없이 개인으로서 기업과 노무공급계약을 맺고 일하는 사업자다. 사업자지만 근로자 버금가게 높은 종속성을 보이는 개인들이다. 즉, 법적으로는 근로제공의 방법과 근로시간을 독립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자영업자로 규정되지만, 실제 노동과정에서는 특정 사용자의 지휘와 명령을 받으며 암묵적인 사용종속관계에 놓여 있다고 느낄 경우가 많은 이들이다. 실제 노동과정은 상당부분 종속노동관계(사용종속관계)의 굴레에 묶여 있지만, 법률적 지위로 인해 노동법의 보호에서는 배제된 이들이다. 요컨대, 자영자성과 근로자성이 모호하게 중첩된, ‘문제적 존재 기반’ 위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종류의 근로형태는 최근 확산됐다. 근대화 시기 틀이 잡힌 노동 관련 법체계와 행정체계에게는 생소하다. 논쟁적이다. 그래서 ‘특수’하다.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특수한 존재 조건에 놓여 있는 이들은 100만 명이 훨씬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일하고 있는 영역도 다양하다. 즉, 이미 사회적으로 ‘보편’적이다. 특수고용노동자들은 건설 현장과 제조업 공장에 있고, 병원과 금융권에도 있다. 우리는 특수고용노동자들에게 크게 의존하는 물류운송체계에 기반해 생활하며, 특수고용노동자들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만화영화를 즐기고, 특수고용노동자들에게 아이들의 사교육을 맡긴다. 음주 시 특수고용노동자들에게 대리운전을 맡기고, 프랜차이즈 점포에 들러 특수고용노동자들이 만든 빵을 사고, 특수고용노동자들에게 머리 손질을 부탁한다. 이처럼 다양한 영역에서 많은 이들이 개인사업자, 프리랜서 등의 이름 아래 ‘일하는 만큼 벌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자기 시간과 관계를 쏟아 붓고 있다.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특수고용과 같은 근로형태가 급속하게 확산된 이유는 뭘까? 여러 가지 설명이 제기되지만 세계화, 금융화, 정보화, 서비스화 등 거시적인 사회 변동에 대응하는 자본의 전략 변화에 초점을 맞춘 것이 가장 그럴듯하다. 즉, 새로워진 시장환경에 대응하여 기업들이 노동비용 유연성, 조직 유연성, 재무 유연성을 확보하고, 기업가적 위험성을 분산시키기 위해 선택한 ‘위계적 아웃소싱 전략’이 특수고용 등의 확산에 영향을 줬다는 주장이다. 고도화된 시장경쟁 리스크에 대비하기 위해, 기업들이 예전 같으면 근로계약을 맺고 정식 직원으로 채용할 이들과 도급과 위임 등의 사업자 간 노무공급계약을 맺고 있고, 예전에는 직원이었던 이들 중 일부를 사업부제나 소사장제 등을 통해 조직의 바깥벽으로 밀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적 근로형태의 모호한 매력
그런데 이게 뭐 어떻다는 걸까? 뭐가 ‘문제적’이고 ‘논쟁적’이라는 것일까? 자본을 거의 소유하지 못한 개인들에게도 시장경쟁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니, 결과적으로 기업들의 위계적 아웃소싱 전략은 사회적 형평성을 고양시키는 선택은 아닐까? 관료적 기업조직 안에서는 ‘유리 감옥’의 수감자 신분인 저학력자와 여성 등도, 시장경쟁 아래서는 개인적인 능력과 노력 여하에 따라 획기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다. 시장의 규칙은 성별이나 신분의 제약에서 벗어난 ‘공정한 경쟁’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기회 자체를 차단당한 일부 개인들에게 이는 “매력 있는 일”이다. 자영업자로서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 자영업자임에도 사용종속관계를 강하게 요구받는 것 등은 특수고용노동자들이 적은 자본으로 이러한 기회를 얻기 위해 감내해야 할 대가는 아닐까? “불만”을 가질 일이 아니지 않을까?
“조금만 내 머리가 빨리빨리 돌아가면 참 매력 있는 일인 거 같아. …… 영업 잘되면 성취감 짜릿한 것도 있고, 말 그대로 능력 있는 사람은 더 하는 거고 게으르면 바로 표시가 나는 게 세일즈니까, 뭐 거기에 대해서 나는 불만 없어.” (보험설계사)
이정희 씨는 주부로 지내다 사십대 초반 남편과 헤어진 후 이 일 저 일을 거쳐 2년 전부터 보험설계사를 시작했다. 그는 현재 직업에 만족한다. 그가 이전에 했던 식당주방일 등과는 달리 단순반복적인 육체노동에 하루 종일 매이지 않고, 상대적으로 “남들이 우습게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보험설계사로 벌어들이는 월 소득은 식당주방일을 할 때 받았던 130만 원보다 적지만, 화장품방문판매까지 ‘투잡’을 하면서 벌충한다. 개인사업자로서 근로시간과 장소를 스스로 조정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또한 보험회사 교육 프로그램과 각종 언론 기사에서 이른바 ‘억대 보험왕’의 사례들을 자주 접하면서, 간혹 그런 이야기들의 프레임 위에 자기 미래 모습을 겹쳐본다. 그러면 전에는 가질 수 없었던 ‘희망’이 가시거리 안에서 구현된다. 좀 더 노력하면 촉각으로도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다.
불합리하고 부당한, 그리고 불안정한
그러나 이정희 씨가 느끼는, 혹은 좀 더 “머리가 빨리빨리 돌아가면” 느낄 거라 믿는 이 직업의 “매력”은 보편적이지 않다. 2년 전 그와 함께 교육을 받은 16명의 동기들 중 현재 남은 이는 4명뿐이다. 회사가 압박하는 영업실적, 즉 “성적을 못 맞추니까 비전이 없게 느껴져서 그만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특수고용노동자들은 자본을 모으고 실력을 키워, 언젠가는 ‘진정한’ 사업자 혹은 프리랜서가 될 거라는 희망을 갖고 열악한 오늘을 버텨낸다. 그러나 성공신화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극소수다. 그리고 시장은 패자에게 냉혹하다. 적은 자본을 가지고 도전한 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결국 특수고용직 노동시장은 능력과 운에 따라 ‘희망’을 잡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단물 빨리고 경계 밖으로 내몰리는 구조다. 낮은 진입장벽 덕에 빈자리는 금세 채워진다. 이러한 순환 과정에 근본적으로 내재한 불안정성을 체감한 이들에게, 특수고용노동자로 살아가는 것이 매력적이지만은 않다.
그런데 ‘소수만이 성공한다.’는 것은 자본주의체제의 불문율 아니던가? 시장경쟁 탈락에 따른 책임은 당연히 스스로 져야하지 않나? 하지만 특수고용노동자들은 시장경쟁에 독립적으로 참여하는 주체가 아니다. 상당 부분 기업의 지휘와 명령을 받고 일한다. 즉, 노무공급계약을 맺는 기업과 개인 간에는 커다란 권력 격차가 존재한다. 이러한 불균형한 관계를 무시하고 양자를 자유롭게 경쟁하는 사업자로 법률적으로 동등하게 취급하는 현실은 불합리하다. 이러한 불합리한 조건을 이용하여 다수의 특수고용노동자들에게 시장경쟁의 리스크를 일방적으로 전가하고 열악한 노동조건을 강제하는 기업들의 태도는 부당하다. 종속노동관계는 근로자에게 자기 재생산이 가능한 최저 기준 이상의 노동조건과 사회적 보호를 제공하는 것을 전제로 성립한다. 특수고용노동자가 종속노동자(근로자)로서 성격을 상당부분 드러냄에도 기업과 제도가 이러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러한 맥락에 따라 특수고용노동자로서 삶에 “매력”보다 “불만”을 느끼는 이들은 근로자와의 비교를 통해 자신들의 처지와 현실에 대한 인식을 구성한다. 노동법의 보호를 받는 근로자에 비해 자신들이 “너무나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중간착취와 자의적 해고 등 노동법이 금지하는 행위들이 자신들에게는 제약 없이 자행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악덕”이라 느끼는 이러한 행위들의 대부분은 노동법 관련 판례들이 누적해온 구체적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불법’이 아니다. 한편에서는 중간착취와 자의적 해고로 인식되고 불안과 분노를 자극하는 행위들이, 다른 한편에서는 시장논리에 따른 최적화된 거래 관행, 수요와 공급 불일치로 인한 단기적 조절로서 정상적인 행위로 이해될 수도 있는 것이다.
판단을 가르는 것은 결국 어디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는가 하는 점일 터다. 양편을 오가며 두루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에게 귀 기울이는 태도가 필요하다. 당사자의 목소리를 깊게 듣고 엄밀한 사실판단에 근거해 폭넓게 성찰할 때, 특수고용직이라는 문제적 존재 기반의 사회적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중간업체들이 말하는 게 법
“프로그램사, 단말기업체, 통신사, 보험사 등한테, 우리가 이렇게 다방면으로 뜯어 먹히고 있는 거예요. …… 주면 주는 대로만 받아먹어야 되는, 그리고 업체가 항상 무소불위의 권력을 하는, 고압적인 현실 때문에 어려워요.” (대리운전기사)
대리운전기사 이상훈 씨는 자신들이 “다방면으로 뜯어 먹히고 있”다고 느낀다. 이상훈 씨 주변 대부분의 대리운전기사들이 한 달 동안 밤샘 일을 하고 집에 가져가는 돈은 대략 “130만 원에서 170만 원” 사이다. 손님들에게 받는 운임 총액은 그보다 훨씬 많다. 그러나 프로그램사, 콜센터, 중개업체 등으로 이뤄지는 복잡한 다단계 알선구조가 매출의 20% 이상을 수수료로 떼어 가고, 통신비와 보험료, 교통비 등을 모두 개인 부담으로 처리하면 그렇게밖에 안 남는다. 지난 몇 년간 운임 단가는 내려가고 수수료 비율은 올라갔다. 정보화시대의 새로운 테크놀로지 덕분이다. 손님의 주문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기사들에게 효율적으로 전달해주는 인터넷 기반 프로그램의 발전 덕분에, 기사들의 노동량은 늘고 수입은 줄었다. 대신 기사와 주문자 사이에는 몇 겹의 가파른 계단이 생겼다.
이러한 계단의 가장 아래층에 있는 특수고용노동자들은 위층에서 “주면 주는 대로만 받아”야 한다. 운임이든, 수수료든 “중간업체들이 말하는 게 법”이다. 다단계 구조를 허덕이며 오르내리는 입장에서는 알선업체들이 가만히 앉아서 챙기는 ‘통행료’(수수료)가 부당하게 보일 수 있다. 이게 혹시 이른바 중간착취일까? 그러나 ‘중간착취의 배제’는 근로기준법상 조항이다. 근로자들이 취업 알선이나 고용 유지 과정에서 금품을 갈취당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항이다. 대리운전기사 같은 개인사업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것은 단지 거래와 교환의 문제일까? 월 150만 원 벌기가 힘든 현실은 수요-공급 규칙이 만들어낸, 시장 참여자라면 당연히 수용해야 하는 균형점일까? 이도 아닌 것 같다. 이상훈 씨처럼 현실에 분노한 이들이 보기에 이러한 열악한 노동조건을 강제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완력’이다. 아니,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빤히 보이지만 법률의 프레임에만 포착되지 않는 “무소불위의 권력”이다.
네 밥줄을 내가 쥐고 있다
막스 베버에 따르면 권력이란 어떤 사회적 관계에서 한 행위자가 다른 행위자의 저항에도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을 개연성이다. 특수고용노동자 입장에서 기업은 권력을 “고압적”으로 휘두른다. 기업과 특수고용노동자는 계약자유의 원칙에 따라 법률상 동등한 사업자로 노무공급계약을 맺지만, 현실에서 양자가 위치한 경제적 고도(高度)는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 또한 양자 사이에는 심연(深淵)이 있다. 특수고용노동자들은 기업이 내려준 동아줄에 온몸으로 매달려야만 시장이라는 추상적 공간에, 그리고 나날의 밥벌이에 참여할 수 있다. 즉, 경제적으로 종속돼 있다. 기업은 이러한 경제적 종속관계에 터해 특수고용노동자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즉 지휘와 명령을 관철한다. 이에 저항하는 경우 밥벌이의 동아줄이 끊긴다. 보이지 않는 억센 완력이 끊어낸다. 존재가 심연으로 삼켜져 “깔끔하게 끝”난다.
“장거리 기사들은 알선소가 어디 있는지도 몰라. 그냥 (알선소에서) 전화 안 받으면 그날부로 깔끔하게 끝나는 거야. …… 찍힌 놈들은 ‘컴퍼스 오더’를 보내. 경기도 오더면 남쪽 끄트머리에서 북쪽 끄트머리로 왔다 갔다 하는 거를 보내. 그런 건 기름 값 빼고 남는 게 없어.” (화물트레일러기사)
이렇듯 경제적 종속관계 아래에서는 사용종속성이 명시적이지 않음에도 기업이 특수고용노동자들에게 자신의 지휘와 명령을 쉽게 관철할 수 있다. 경제적 종속관계란 ‘네 밥줄을 내가 쥐고 있다’는 문장을 고상하게 축약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불복종하는 “찍힌 놈들”을 처벌할 수 있는 암묵적인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명시적인 사용종속관계에 따른 노동법의 규제를 받지 않으므로 더 노골적으로 쥐고 흔들 수 있다. 기업이 특수고용노동자와 계약을 끊기 위해서는, 즉 해고하기 위해서는 ‘긴박한 경영상 필요’ 같은 조건을 충족시킬 필요가 없다. “너 마음에 안 들어. 그만둬.”라고 하거나, 그냥 업무 배정 프로그램의 접속 아이디를 막아버리면 된다. 업계가 그리 크지 않을 경우 노조를 만들려 했거나 퇴직금 소송에 참여하는 등 ‘괘씸죄’가 있는 이들은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돌릴 수도 있다.
불안과 뒤엉킨 차가운 이윤 동기
물론 이러한 처벌은 일상적이지 않다. 극단적인 사례들이다. 그러나 이런 일이 어떤 법제도로도 제어되지 않으며, 종종 실제로 일어난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특수고용노동자들에게 자신들의 존재 기반 상당부분이 사회적 연대의 안전망 위에 자리 잡은 게 아니라, 시장이라는 추상적 허공 안에 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자극이 된다. 특수고용노동자들은 한편으로는 그러한 불안정성이 야기하는 불합리함과 부당함에 대한 분노로,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구조적 불안정성에 대한 냉담한 인정과 수용으로 반응한다. 지배권력이 허용하는 것은 당연히 후자다. 그리하여 개인의 내면에서는 불안과 뒤엉킨 이윤 동기가 활성화된다. 특수고용노동자들의 노동과정을 지배하는 질서는 이러한 차가운 이윤 동기가 원활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조직돼 있다. 그리고 결국에는 기업에게 이윤이 최대로 돌아가도록 조작돼 있다.
“(수수료로 특수고용노동자 개인이 가져가는 비율이) 매출액이 300만 원 미만이면 30%, 4백만 원 미만이면 40%, 5백만 원 미만은 49%……. 매출을 많이 올릴수록 많이 가져가는 구조로 보이지만, 생각해보세요, 남의 주머니에서 매달 2천만 원[매출액 600만 원], 3천만 원씩을 어떻게 빼내요?” (신용관리사)
그렇게 “빼내”기가 어렵기 때문에 한때 연극배우를 했을 정도로 감수성 예민한 김영수 씨도 채권추심 일을 할 때는 “의도적으로 무감각”해지고, 채무자의 삶이 아닌 채권자의 서류를 바라보며 “독하고 모질게” 달려든다. 자기 가족의 생계가 무엇보다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도 “월 200만 원 가져가기가 힘들”다. 김영수 씨의 신용관리사 동료들 대부분이 그렇다. 그럴 수밖에 없다. 분배의 룰은 기업 측이 정한다. 특수고용노동자들이 정말로 더 “많이 가져가는 구조”를 용납하는 기업은 없다. 그리하여 특수고용노동자에게 제시되는 매출액 대비 소득의 함수는 오른쪽 위로 시원하게 뻗은 포물선이나 직선이지만, 현실에서 이들의 입금계좌에 매월 찍히는 숫자는 대부분 영점 부근의 좁은 범위 안에만 있다. 그 범위를 뚫고 치솟아 찬란하게 빛나는 ‘억대 연봉왕’들은 통계적으로 배제되는, 말 그대로 ‘극단치’일 뿐이다.
스스로를 착취하는 가짜 자본가
그러나 이러한 극단치의 존재와 그 그래프의 가시적인 역동성은 개인적인 삶의 고달픔이나 갈증과 기이하게 결합하여, 간혹 어떤 이들에게는 ‘신기루’로 작동한다. 조금만 더하면 손이 닿을 것 같은 애달픔과 어떻게든 저 높은 곳에 도달하고 싶은 열망을 일으킨다. 이러한 열망을 간직한 특수고용노동자 개인이 현실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경우 그동안 해온 일을 더 많이 더 열심히 할 뿐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평균 이상의 소득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진정한’ 사업자나 프리랜서가 될 수 없다. 특수고용노동자들의 노동과정과 소득분배는 기업에 대한 경제적 종속관계 아래서 구조화되기 때문이다. 구조적으로 통제되는 범위에서 개인의 노동 시간과 강도를 증대하는 것으로는, 구조적으로 한계 지어진 소득 범위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기업의 손바닥 위일 뿐이다. 애달플 뿐이다.
그런데 이는 단지 애달프기만 한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신기루’를 향한 행진은 개인의 삶을 사막화할 수 있다. 달성 불가능한 고소득을 향한 개인들의 ‘자발적인’, 그리고 법적 기준에 제한받지 않는 노동의 시공간 확장은, 개인생활과 인간관계를 메마르게 할 수 있다. 차가운 이윤 동기와 뒤엉킨 이 기이한 욕망의 추구에 의해, 노동시간과 여가시간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동료애보다 경쟁의식이 앞서게 되며, 영업대상과 친교대상이 뒤섞이는 일 등이 벌어진다. 이를 테면, “일요일 집에서도 무전기와 PDA에 신경을 집중”하다가 “괜찮은 오더 나오면 바로 옷 갈아입고 출발”하고, 거리에서 동종업계 종사자를 알아봐도 “저 사람 것을 뺏어 와야 내 것이 되고 내 것은 뺏기면 안 되니까” “쳐다보지도 않”으려 할 수 있다. 영업실적을 맞추기 위해 사적 모임에 가서 “아는 사람들 귀찮게” 하거나, 일과시간이 아님에도 낯선 이가 쏟아내는 “남편 흉부터 별의별 이야기”에 장단 맞춰야 하는 일도 종종 있다.
물론 특수고용노동자 모두가 이러한 식으로 행동하지는 않는다. 또한 자본주의체제에서 노동이 사적 삶의 시공간을 질시키는 경험은 특수고용노동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노동중독’은 오늘날 보편적이다. 그러나 기업가적 위험성을 공유하는 특수고용노동자들이 종속노동관계에 놓여 있는 근로자에 비해 삶을 사막화하는 신기루적 욕망에 민감하다는 주장은 어느 정도 개연성이 있다. 기업가적 위험성, 즉, ‘시장경쟁의 리스크’를 내면화한 개인에게 주어진 이윤 창출의 도구가 결국 “자기 신체”뿐이라면, 스스로를 “수탈”하고자 하는 욕망을 자극받는 것은 어느 정도 당연하다. 이는 노동법을 적용한다고 제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노동법 같은 근대적인 규범은 타인에 의한 초과착취를 규제할 뿐이다. 자본 없는 ‘사업자’, 자유 없는 ‘프리랜서’의 허울 아래 이뤄지는 자기착취는 제어할 수 없다.
사회를 보호하라! 살아 있는 관계를 회복하라!
요컨대, 특수고용과 같은 근로형태는 자본에 의해 전략적으로 선택된 ‘새로운’ 종류의 노동력 상품이다.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새롭다. 우선, 근대적인 노동법 규제의 그물에 잘 포착되지 않는다. 다음으로, 자기착취 혹은 착취의 내면화가 가능하도록 고안돼 있다. 자본 입장에서 매우 효율적이다. 그러므로 사회적으로 문제다. 앞서 언급했듯 특수고용 노동시장의 순환 과정은 매우 급격하고 불안정하다. 즉, 노동자의 안정적인 재생산을 보장하지 않는다. 또한 특수고용노동자의 노동과정 및 분배관계를 규율하는 질서는 근대사회가 합리화 과정을 통해 쌓아 올린 규범과 충돌한다. 불합리하고 부당하다. 사회적인 분노와 긴장을 누적시킨다. 이러한 위태로운 결과들을 야기하는 특수고용 등의 확산은 칼 폴라니가 말하는 ‘시장의 자기조정 운동’의 결과다. 완전자유시장이라는 실현 불가능한 허구적인 유토피아가 살아 있는 인간의 삶과 사회적 관계들을 잠식해 가는 과정이다.
한편, 폴라니는 이에 대응하는 ‘사회의 자기회복 운동’을 주장한다. 근대 초기 노사관계를 민법상의 채권관계로 보고 노동력 거래를 계약자유의 원칙 아래 자유방임하던 데서, 자본과 노동 간 힘의 불균형으로 인한 종속노동관계를 실체로서 인정하고, 민법의 원칙을 거스르는 노동법의 강화를 통해 이를 보호하기 시작한 것이 그 사례다. 폴라니에 따르면 세계는 이러한 상호 길항하는 이중적 운동에 의해 구현된다. 특수고용의 확산은 이른바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자기조정시장 운동의 결과다. 그리고 우리가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기반으로 확인했듯, 이는 인간의 희망을 착취하고 사회적 관계를 황폐화한다. 이러한 파괴적 흐름은 결국 사회의 규범적 자기회복 기능을 촉구하게 될 것이다. 이는 결국 노동법을 확장 및 재구성하고, 기업에게 더 큰 책임과 사회적 규제를 지우는 방향으로 귀결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스스로에게 이미 내면화된 자기착취를 극복할 수 있을 때 가능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