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과 노동의 만남, 그리고 ‘희망’

노동사회

촛불과 노동의 만남, 그리고 ‘희망’

편집국 0 3,758 2013.06.06 04:00

2008년 ‘기륭전자 1,000일 투쟁’이 한참 진행될 때 낯선 이들이 공장 앞으로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광우병 촛불 투쟁에 함께 했던 이른바 촛불 시민들이었다. 그 무렵 방향을 잃고 있던 ‘촛불’ 중에 일부가 기륭투쟁의 소식을 듣고 컨테이너 농성장을 찾아온 것이다. 촛불들은 밥을 해오기도 하고, 옷가지를 싸가지고 오기도 하고, 매일 저녁 진행되는 촛불문화제에도 참석했다. 투쟁기금을 몰래 놓고 가는 촛불도, 농성장에서 같이 잠을 자는 촛불도 생겨났다. 촛불들의 등장에 기륭전자 동지들과 연대단위 동지들은 신기한 눈으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개인들의 자발적인 연대를 처음 경험했기 때문이다. 

또한 촛불에 대한 환상도 깨져 나갔다. 촛불이라고 하면 최소한 잘 차려 입은 사무직 노동자쯤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기륭에 찾아오는 촛불들은 다름 아닌 평범한 우리 이웃들이었다. 촛불의 결합을 시작으로 기륭전자 투쟁에 대한 사회적 연대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륭전자 투쟁은 사회적 울림을 만들어냈지만 공장의 담을 넘지는 못했다.

기륭공대위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비없세’

기륭전자투쟁공동대책위원회(이하, 기륭공대위)는 1,000일 투쟁을 계기로 단위사업장을 넘어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적 연대기구 구성을 제안했다. 기륭 투쟁의 핵심인 비정규직 불법파견 문제의 해결은 단위사업장을 넘어야만 가능한 것이고, 또한 기륭 자본의 배후에 자본가들의 대표인 경총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한편, 2008년은 기륭 투쟁뿐만 아니라 뉴코아-이랜드, KTX승무원, 코스콤 등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들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투쟁들을 통해 비정규직 투쟁사업장과 연대단위들은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공장의 담을 넘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때문에 기륭공대위의 제안에 흔쾌히 동의할 수 있었다. 

기륭전자 농성장 부근에서 열린 첫 회의에서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네트워크’(이하, 비없세)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기존 연대단체의 조직형식주의나 관료적 사업방식에서 벗어나, 비정규직 문제만을 가지고 조금은 가볍고 느리지만 함께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는 비정규직 연대기구의 구성에 참석자들은 쉽게 동의했다. 비없세에는 비정규직 없는 세상과 일하는 이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세상은 가능하다고 믿는 단체들과 개인들이 참여했다. 

비없세에는 진보정당과 낯익은 연대단위들뿐만 아니라, 조직형식을 갖춘 촛불들, 그리고 개인 촛불들도 참여했다. 당시 비없세는 ‘회의 소집권자’만 두고서 사안별로 자유롭게 모여서 논의하고 집행하는 느슨한 네트워크 조직이었다. 

비없세의 첫 사업, ‘비정규직 없는 세상 1만인 선언’ 

비없세의 첫 사업은 ‘비정규직 없는 세상 1만인 선언’(이하, 1만인 선언)과 ‘비정규직 노동자 1만인 권리선언’(이하, 1만인 권리선언)이었다. 1만인 선언은 조직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평범한 시민들의 참여가 줄을 이어 1만 명을 쉽게 모아낼 수 있었으며, 신문에 광고까지 낼 수 있었다. 우리가 만들어 사회적 공감대를 얻은 첫 사업이었다. 1만인 권리선언은 투쟁하는 비정규직 주체들의 요구와 바람을 모아 만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권리선언이었다. 

1만인 선언과 1만인 권리선언과 함께 사람들을 모아낼 수 있는 ‘광장사업’도 병행했다. 청계광장에서 진행한 광장사업은 기존의 집회 방식이 아닌 문화행사 위주로 진행되어 시민들의 많은 호응을 얻었다. 

비없세는 2009년 용산철거민참사범국민대책위원회(이하, 용산범대위)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일터에서의 해고’와 ‘삶터에서의 철거’가 모두 신자유주의 착취논리 속에서 진행된다는 점에 주목하고, 비정규직과 철거민의 생존권 투쟁을 결합해냈다. 이것이 가능했던 데는 전국철거민연합(이하, 전철연)이 비없세의 참여단위로 활동해 온 측면도 크다. 당시 전철연은 비없세 참여를 결정하고, 비정규직 연대사업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2009년은 용산범대위 활동에 집중하면서 사실상 비없세 고유의 활동은 중단되었다. 

2010년에는 비정규직 문제의 핵심인 ‘간접고용 문제’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진보정당과 함께 간접고용 실태조사를 실시해 보고서를 발간했으며, 국회에서 공청회까지 개최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언론 사업들을 통해 간접고용의 실상을 사회에 폭로하고 간접고용 의제의 사회화에 주력했다. 또한 기륭, 동희오토, 지앰대우, 재능교육 등 비정규직 투쟁사업장들에 지속적으로 연대했다. 

아래로부터 삶의 기준 만들기, ‘사회헌장 제정운동’

비없세는 2011년부터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사회헌장 제정운동’(이하, 사회헌장 제정운동)에 주력하고 있다. 사회헌장 제정운동을 뒷받침해 줄 ‘함께행동’ 사업도 병행해서 추진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불안정한 일자리와 저임금, 일상적 차별로 고통을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전체 노동자의 절반이 넘는다.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경제정의도, 민주주의도 불가능하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권리 찾기는 우리 모두의 과제다. 비없세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연대만 하는 것을 넘어서, 비정규직 문제를 전 사회적인 의제로 놓고, 모두가 함께 하는 사회적 투쟁을 만들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비정규직 일자리를 끊임없이 만드는 세상과 맞서는 구체적인 방식으로 사회헌장 제정운동과 함께행동이 제안된 것이다. 

비없세의 사회언장 제정운동은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헌장의 내용을 미리 만들어서 그것에 대한 사회적 동의를 묻는 방식이 아니다. 아래로부터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시민들에게서 그들이 생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권리의 내용들을 받아안고, 그것을 모아 헌장의 제정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밟고자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헌장은 비정규직 없는 세상에 대한 사회적 기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비록 한계가 있겠지만, 유엔 인권선언이나 국제노동기구 노동협약이 우리 사회 인권과 노동에 대한 기준들을 만든 것처럼, 비정규직 없는 세상에 대한 광범위한 사회적 동의들과 상상들을 모아 헌장이라는 형태로 구체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사회헌장은 법적인 구속력을 갖지는 않지만, 이를 뛰어넘는 사회적 구속력을 갖게 될 것이다. 이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하거나 사회적으로 요구를 제기할 때 중요한 근거가 될 것이다. 

비없세는 이렇듯 광범한 참여 속에 만들어지는 사회헌장을 바탕으로, 비정규직 일자리와 나쁜 기업 추방운동, 대규모 군중 집회, 민중 투표 등 다양한 사업들을 진행하여,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투쟁을 끈질기게 이어나갈 것이다. 

1단위 1사업, 함께 행동해요!

함께행동 운동의 내용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대한 의지를 가진 모든 이들의 자발적 행동을 조직하자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비없세에 참여하는 다양한 단체들과 개인들이 각자 특성과 조건에 맞게 ‘1단위 1사업’을 전개하고, 이 사업들을 통해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사회적 관심을 촉구하고 가이드라인의 필요성을 확인시켜내자는 것이다. 

비없세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권리를 주제로 ‘금요촛불문화제’를 사회헌장의 제정이 마무리될 때까지 청계천 파이낸스 빌딩 앞에서 매주 진행한다.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함께 하고 있다. 또한 이는 많은 시민들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열린 광장이다. 이 외에도 비없세는 사회헌장 제정운동 고민하면서 다양한 기획사업들을 진행했다. 작년 여름을 뜨겁게 달궜던 ‘희망버스’도 그 일환이었다. 

비없세가 제안한 희망버스, 그리고 희망뚜벅이

희망버스는 비없세가 제안한 기획사업이다. 김진숙 지도위원의 고공농성이 사회적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을 때, 정리해고 없는 세상과 비정규직 없는 세상은 다르지 않다는 판단에 따라,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철폐를 위한 희망버스’(이하, 희망버스)를 출발시켰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자들과 김진숙 지도위원을 응원하기 위한 희망버스는 전 사회적 관심을 모았다. 5차 희망버스까지 탑승객들은 무려 3만 7천여 명이나 된다. 자발적 개인과 수많은 단체 활동가들이 주말휴일을 반납하면서 희망버스에 올랐다. 한 여성 노동자에 대한 응원을 넘어, 더 나은 세상과 정리해고 철폐를 위한 희망 찾기였다. 희망버스는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시민들에게 그것을 자신의 문제로 인식시키고, 연대의 즐거움을 일깨워주었다. 또한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는 절망의 시대에서 다시금 희망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의 불씨를 안겨 주었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문제가 타결되면서 희망버스는 향후 진로를 고민하기 위한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단순한 단위사업장 투쟁들의 응원을 넘어,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광범위한 사회적 연대를 바탕으로 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으로 모아졌다. 그 시작이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향한 희망뚜벅이’(이하, 희망뚜벅이)였다. 

희망뚜벅이는 비정규직투쟁의 상징이 되고 있는 재능교육 1,500일 투쟁과 최근 스물한 번째 사회적 타살이 벌어진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1,000일 투쟁을 잇는 희망발걸음이었다. 또한 언론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정리해고 투쟁사업장들과 비정규직 투쟁사업장들과 연대하는 발걸음이었다. 2012년 1월29일 서울 재능교육에서 출발해서, 투쟁사업장들을 도보로 순회하면서 2월11일 평택 쌍용자동차 희망텐트촌에 도착하는 일정이었다. 

희망버스와 함께 했던 배우, 시인, 영화감독 등이 함께했으며, 김진숙 지도위원도 응원단장으로 같이했다. 희망버스 탑승객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희망뚜벅이들에게 힘이 되어 주었다. 그 결과 희망뚜벅이의 연대 발걸음으로 세종호텔 투쟁이 타결되는 소중한 성과를 얻어내기도 했으며, 힘들고 어려운 조건 속에서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싸우는 투쟁사업장들에게 힘이 되어 주었다. 

비없세와 조직노동운동의 만남과 소통

2010년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의 승리는 동희오토 투쟁의 승리로 이어졌다. 포기하지 않으면 승리할 수 있으며, 사회적 관심과 연대가 무엇보다도 소중하다는 것을 다시금 일깨워 주었다. 비없세는 이러한 투쟁들에 중심에 서 있었다.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은 2010년 가을 전국노동자대회 때 (가칭)‘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범국민 운동본부’(이하 범국본)를 구성할 것을 제안했다.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범사회적 연대를 제안한 것이다. 민주노총이 앞장서서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비없세와 민주노총 위원장이 제안한 범국본이 자칫 충돌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민주노총 위원장을 직접 찾아가서 비없세의 활동을 이해시키고, 민주노총이 함께해 줄 것을 부탁드렸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민주노총도 비없세와 함께하고 있다. 그동안 비없세가 보인 실천들과 참여단체들의 다양함, 참여와 활동이 자유로운 사회적 네트워크 조직이라는 특성이 민주노총이 그러한 결정을 내리는 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민주노총은 비없세가 핵심적으로 하고자 하는 사회헌장 제정운동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비없세에는 노조조직으로는 민주노총과 금속노조, 금속노조 비정규직 투쟁본부와 투쟁사업장 노조들이 참여하고 있다. 

비없세와 공조직의 관계 설정은 사실 아직까지 논의된 바 없다. 하지만 희망버스를 계기로 우려의 목소리들이 있는 게 사실이다. 희망버스가 한창일 때 노조 간부들 사이에서 “희망버스가 언제 끝이 나냐”라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 후 비없세와 희망버스가, “공조직을 흔든다.”, “특정 정파가 주도한다.”, “공조직의 체계와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등의 말들이 잇따랐다. 일부의 목소리라고는 하지만 귀담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기존의 조직활동 관점으로는 비없세와 희망버스를 이해하기 힘든 게 사실이다. 비없세는 민주노총의 비정규직 운동에서 부족한 부분인 사회적 연대를 더 풍부하게 하고, 사회적 연대 과정에서 공조직이 갖는 불편을 조금이나 덜어주고자 한다. 또한 네트워크 조직의 장점을 살려서 다양한 기획력과 발 빠른 대응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사회적으로 환기시키는 역할을 해나가고 있다. 비없세와 희망버스는 공조직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연대하고자 노력했다. 그러한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비정규직 없는 세상은 가능하다! 

비없세는 비정규직 없는 세상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개인들과 단체들이 모인 연대기구이자 네트워크다. 비없세는 비정규직 운동을 확장시키고, 이에 대한 사회적 연대를 폭넓게 조직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기륭에 촛불이 처음 등장한 이후 촛불로 표현되는 많은 양심적인 세력들이 비정규직 운동에 연대하기 위해 손길을 내밀고 있다. 

이들은 투쟁사업장 동지들 자녀들의 과외선생님이 되기도 하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응원단이 되어 주고 있다. 멈출 줄 모르는 신자유주의 경쟁구조에서 노동의 문제, 특히 비정규직 문제가 결코 남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희망버스를 통해 그것을 확인했으며, 장기투쟁사업장들에 촛불들의 연대가 계속되고 있는 것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촛불시위는 기존 사회운동의 내용과 방식, 집회 방식과 문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많은 운동세력들이 촛불의 영향으로 변화를 추구했지만, 주체의 헌신과 노력 부족으로 제자리에 머물고 있다. 이러한 속에서 비없세는 촛불과 비정규직 운동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만들어내고자 한다. 하지만 어려움도 여러 가지 있다. 네트워크 조직이기 때문에 소속감이 부족하고, 회의와 활동의 참여가 느슨하며, 재정과 집행구조의 담보가 쉽지 않다. 그러나 비없세는 네트워크 조직의 장점을 더욱 살려 어려움을 극복해나갈 것이다. 

현재 비없세에 참여하는 단위로는 민주노총, 진보정당, 민중의 힘 등 기존 민중사회단체들 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 예술, 종교, 작가 단체 등이 있으며, 개인 촛불들과 청년유니온, 비정규센터 등이 있다. 그 중에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어린이책 작가 모임’은 사회헌장 제정운동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1단위 1사업으로 비정규직 관련 어린이 잡지를 만들고 있기도 하다. 이 책에서 나오는 인세는 비없세에 기부하겠다고 한다. 

비없세는 올 한해 사회헌장 제정운동에 주력할 계획이다.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모든 정당들이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각자의 답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다들 근본적인 해결책과는 거리가 멀다. 비없세는 정치권에 기대거나 안주하면서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노력과 대중들의 참여와 직접행동으로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만들어갈 것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6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