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은 1960년대 기업활동에 따른 환경오염문제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한 이슈이다. 이러한 CSR은 1980년대와 90년대를 지나면서 △소비자보호, △종업원의 노동기본권 보장, △회계의 투명성과 기업지배구조의 민주성, △하청업체의 건전한 기업운영 등 기업활동 전반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최근에는 그러한 사회적 책임이 비단 기업뿐만 아니라 정부나 비정부기구(NGO) 등 모든 형태의 조직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CSR에서 기업을 뜻하는 ‘C'를 뺀 사회적책임(SR)에 관한 논의가 국제적으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기도 하다.
‘사회적 책임’에 관한 새로운 국제표준 ISO 26000
CSR의 실현을 위해 다양한 국제기구들이 활동을 펼치고 있다. OECD는 다국적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제고하기 위하여 1976년에 제정된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Guidelines for Multinational Enterprises)을 2000년에 개정하면서 뇌물방지, 소비자보호 등을 추가하여 CSR에 관한 국제규범으로서의 성격을 강화하였다. 또한 GRI(Global Reporting Initiative)는 2000년부터 표준화된 지속가능성 보고서(Sustainability Report) 가이드라인을 제시함으로써 기업을 비롯한 모든 형태의 조직들이 경제적, 사회적, 환경적 성과를 공표하도록 하고 있으며, 국제연합(UN)도 인권, 노동기본권, 환경, 반부패 등 4개 분야 10가지 원칙의 준수를 위한 글로벌 콤팩트(Global Compact) 운동을 2000년부터 벌여오고 있기도 하다.
그러한 가운데, 국제표준화기구(ISO)는 2001년부터 CSR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여 모든 이해관계자가 참여하는 전문가회의를 통해 글로벌 콤팩트와 마찬가지로 모든 조직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SR에 관한 통일된 국제표준을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2005년부터 정부, 기업, 노동자, 소비자, NGO, 학계 등 6개 이해관계자를 대표하는 전문가들로 구성된 SR 실무작업반(WGSR)에서 <ISO 26000>이라는 사회적 책임에 관한 표준을 개발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는 2010년에 공표될 예정이다.
ISO 26000은 기업뿐만 아니라 모든 형태의 조직들에게 적용될 표준이라는 점에서 조직의 지배구조, 인권, 노동관행, 환경, 소비자보호, 공정한 운영관행, 공동체개발 등 다양한 분야를 포괄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우선 노동과 관련된 내용만 소개하고 그러한 표준이 갖는 현실적인 의의와 노동조합운동의 대응 방향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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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O 26000 작업초안(Working Draft) 4.1의 구성 체계
1. 범위(Scope)
2. 인용규격(Normative References)
3. 용어와 정의(Terms and Definition)
4.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이해(Understanding Social Responsibility)
5. 사회적 책임의 원칙(Principles of Social Responsibility)
6. 사회적 책임의 실제(Practices of Social Responsibility)
7. 사회적 책임 핵심 주제(Social Responsibility Core Subjects)
7-1. 일반
7-2. 조직의 지배구조(Organizational Governance)
7-3. 인권(Human Rights)
7-4. 노동관행(Labour Practices)
7-5. 환경(Environment)
7-6. 공정한 운영관행(Fair Operating Practices)
7-7. 소비자 문제(Consumer Issues)
7-8. 공동체의 사회경제적 발전
(Social and Economic Development of the Community)
8. 사회적 책임 이행 지침
(Guidance for an Organization on Implementing S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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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분류된 ‘노동기본권’
UN 세계인권선언 발표 50주년인 1998년에 개최된 제86차 국제노동기구(ILO) 총회에서는‘노동에 있어서 기본적 원칙과 권리에 관한 ILO 선언’(ILO Declaration on Fundamental Principles and Rights at Work)을 채택했다. 이로써 △결사의 자유, △강제노동 금지, △아동노동 금지, △차별대우 금지 등 4개 분야 8개 협약을 모든 회원국이 최우선적으로 준수해야 하는 핵심협약으로 규정했다. ISO 26000 작업초안 4.1판에서는 이러한 핵심적인 국제노동기준을 단순한 ‘노동관행’이 아니라 ‘인권’으로 규정하여 인권항목에 포함하고 있는데(7.3.7 Fundamental rights at work),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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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결사의 자유: 노동자 대표들이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는 시설이 제공되어야 하며 방해를 받지 않고 임무를 수행하도록 허용되어야 한다. 단체협약에는 노동쟁의 해결을 위한 조항이 포함되어야 하며, 노동자 대표가 유의미한 협상을 할 수 있도록 정보가 제공되어야 한다.
ㅇ 강제노동 금지: 어떤 조직이라도 법정에서 선고를 받지 않았거나 공공당국의 감독과 통제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죄수들을 고용하거나 그것으로부터 이득을 얻어서는 안 되며, 죄수노동은 자발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민간 조직에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ㅇ 아동노동 금지: 국제노동기준이 정한 최소 고용연령인 15세와 몇몇 선진국에서 정한 14세 미만의 아동을 고용하거나 그러한 아동노동으로 이득을 꾀해서는 안 되며, 18세 미만의 청소년을 작업의 성격이나 환경이 청소년의 건강과 안전을 해칠 수 있는 작업에 고용해서는 안 된다.
ㅇ 차별금지: 조직은 자신들의 고용정책이 성별이나 인종적으로 편향되지 않으며, 급료, 고용조건, 채용정책이 객관적인 작업평가에 의거하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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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청업체에 대한 책임까지 규정한 ‘노동관행’
ISO 26000의 작업초안 4.1판에 서술된 노동관행(Labour Practices)은 노동자의 채용 및 승진, 규율 및 고충절차, 노동자의 이직 및 전근, 고용기간의 만료 및 노동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과 관행을 포함하고 있다. 나아가 하청업체와 같이 연관된 조직의 노동관행에 대한 책임까지도 함께 규정하고 있다. 또한 노동조합을 인정하고 고용과 관련된 사회적 이슈를 다루기 위한 단체교섭, 사회적 대화, 노사정 협의 과정에서 노동자 조직의 대표성과 참여를 보장하는 등, 노동자의 단결권 보장과 일자리 창출 및 적정한 임금 지급을 조직의 가장 중요한 경제사회적 영향이라 지적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노동관행이 사회정의와 안정에 필수적인 요소라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노동관행에 대한 사회적 책임은 ILO가 1944년에 채택한 필라델피아 선언문의 “노동은 상품이 아니므로 생산의 요소로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원칙과, 세계인권선언에서 규정하고 있는 “모든 사람은 자유롭게 직업을 선택하여 생계를 누릴 권리와 공정하고 호의적인 노동조건에서 일할 권리가 있다”는 원칙에 바탕을 두고, 다음과 같이 고용과 노사관계에 있어서 구체적인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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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고용 및 고용관계(7.4.3 Employment and employment relationships)
고용주로서 조직은 법으로 규정된 고용관계를 은폐해서는 안 되며, 부정기적이거나 임시적인 고용의 과도한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 아울러 폐업과 같이 고용에 영향을 미치는 경영상의 변화를 고려할 때는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동자 대표와 협의하고, 자의적이고 차별적인 해고를 하지 말아야 하며, 여성, 청년, 장애인, 이주노동자 등 신분이 취약한 노동자들에게도 동등한 고용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ㅇ 노동조건 및 사회적 보호(7.4.4 Conditions of work and social protection)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모든 조직의 노동조건은 국내법규와 국제노동기준에 부합해야 하고, 국내입법이 미비된 경우에는 국제노동기준이 정한 최저규정을 적용해야 한다. 그러한 국제노동기준에 의해 확립된 원칙에 의거하여 임금, 노동시간, 주휴 및 휴가 등에 있어서 경쟁업체보다 나은 수준의 노동조건을 제공해야 하며, 국내법이나 관행에 따라 가능한 최상의 임금과 노동조건을 제공함으로써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기본적인 요구를 충족시켜야 한다.
ㅇ 사회적 대화(7.4.5 Social dialogue)
사회적 대화는 직장에서 참여와 민주적 원칙을 확립하고 건전한 노사관계를 보장하여 소모적인 노동쟁의를 최소화하고 투자를 촉진하는 데 기여하므로, 각 조직은 사회적 대화 기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위한 사용자 조직이나 단체교섭구조에 참여해야 한다. 노동자의 단결권 및 단체교섭권 행사를 방해할 목적으로 노동자를 해고하거나 차별하지 않아야 하고, 배치전환이나 외주화 등의 협박을 가해서는 안 된다. 나아가 노동자 대표들에게 권한 있는 의사결정권자와 작업장에 대한 접근권을 보장하고 조직의 재정이나 활동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한 정보와 시설을 제공해야 하고, 국제적으로 확립된 결사의 자유에 관한 권리행사를 제한하기 위한 인센티브제도를 시행해서는 안 된다.
ㅇ 산업안전보건(7.4.6 Health and safety at work)
조직은 자신이 고용하고 있는 노동자의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안녕을 촉진 및 유지하고, 유해한 노동조건에 의한 건강훼손을 예방하며, 건강을 해칠 위험으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하고, 노동자들의 생리적, 심리적 능력을 저해하는 작업환경을 조성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건강과 안전문제에 대해 완전하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받을 권리, 건강과 안전 문제에 대해 자유롭게 자문을 구하거나 관계당국에 고발할 권리, 위험한 작업을 거부할 권리, 건강과 안전 문제의 처리 과정이나 의사결정구조에 참여할 권리 등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존중하는 산업안전보건 시스템을 채택해야 한다.
ㅇ 인적개발(7.4.7 Human development)
인적개발은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노동자가 되기 위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기회라는 관점에서 각 조직은 자신들이 고용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기술개발이나 경력제고를 위한 기회를 동동하게 부여하고 합리적인 노동시간을 보장하며, 보육시설이나 육아휴가 등을 제공하여 노동자들의 가족부양의무를 존중함으로써 노동과 생활이 적절한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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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O 26000의 사회적 영향과 노동조합운동의 대응
사회적 책임에 관한 국제표준인 ISO 26000은 이행이 강제되는 경영시스템표준(Management System Standard)이 아니라, 권고적 성격을 지닌 지침표준(Guidance Standard)으로 개발되고 있다. 많은 논란이 그동안 있었음에도 결국 ISO 26000이 구속력이 없는 지침의 성격을 갖게 되었지만, 현실적으로는 단순한 지침 이상의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앞서 살펴본 대로 ISO 26000 작업초안에는 결사의 자유, 강제노동 금지, 아동노동 금지, 차별대우 금지 등 핵심노동기준과 고용 및 고용관계, 노동조건 및 사회적 보호, 사회적 대화, 직업상의 건강과 안전, 인적(자원)개발 등 노동관행에 관하여 기존의 국제노동기준을 상회하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책임이 규정되어 있다. 물론 이처럼 높은 수준이 ISO 26000 개발이 완성되는 단계까지 그대로 유지될 것인지, 아니면 어느 정도 수정이나 완화가 될 것인지는 아직 속단할 수 없다. 하지만 국제노동기준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는 우리의 노동현실과 그 적용대상이 기업뿐만 아니라 정부와 시민단체는 물론이고 노동조합까지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논란과 영향이 예상된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이해와 실천이 윤리경영이나 사회공헌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 속에서 비정규직이 확대되면서 고용불안과 노동시장 양극화가 심화됐으며, 대기업들은 전근대적인 지배구조와 불법경영을 일삼으면서 하청업체에게는 무리한 단가인하 압력을 가해 중소영세기업들의 생존을 위협하고, 그곳에 종사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고용 및 노동조건을 한계상황으로 내몰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노동자의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을 인정하고, 고용과 직업에 있어서 차별대우를 금지하며, 부정기적이거나 임시적인 고용의 사용을 자제하라는 내용의 ISO 26000이 발효될 경우, 우리 기업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과 압력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아울러 ISO 26000이 기업뿐만 아니라, 규모와 형태를 불문한 모든 조직에게 적용될 것이라는 점에서, 정부와 시민사회단체는 물론이고 노동조합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사회적 책임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기업들에게 요구만 하는 데 머물러 왔던 노동조합 또한 ISO 26000 발효에 따른 사회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특히 그동안 일부 간부들의 부패와 독직사건이 드러나 호된 시련을 겪어야 했던 우리 노동조합으로서는, 향후 활동과정뿐만 아니라 내부의 조직운영과 회계절차에 있어서 보다 민주적인 제도와 관행을 정착시켜야 할 것이다. ISO 26000은 이러한 영향을 통해 노동조합운동의 발전에도 상당히 기여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위기를 뚫기 위하여, 의제 및 연대를 확대하기 위하여
노동운동의 쇠퇴가 세계적인 추세인 가운데, 우리나라의 노동조합운동도 이미 위기와 침체 국면에 접어들었다. 게다가 새로 출범한 정부의 친자본적 성향을 감안할 때 이러한 상황을 단시일 내에 극복하기는 쉽지 않으리란 전망이다. 노동조합운동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이때, CSR운동을 통해 노동조합운동의 활로를 모색하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노동조합운동 차원의 CSR 활동은 기업지배구조에 참여하거나 단체교섭을 통해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추동함으로써 노동기본권을 방어하는 소극적인 목표와 의미는 물론이고, 기업별 노조차원의 단체교섭 활동을 보완하는 역할과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임금 및 근로조건 개선에만 매몰되어 온 우리 노동조합운동의 의제를 ‘사회적’으로 확대함으로써, 시민사회와 노동운동이 연대하고 노동운동의 국제적 연대를 실현할 수 있는 매개 고리로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노동자와 노동조합이야말로 CSR의 직접적인 이해당사자이고, 현재 개발되고 있는 ISO 26000이 발효되면 기업이나 정부와 함께 노동조합에게도 사회적 책임이 부과된다는 점에서, 노동계의 적극적인 관심과 대처가 요구되고 있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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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한균, 방정혜 (2007),『사회적 책임(SR) 국제표준화 국내영향 및 대응방안 연구』, 산업자원부 기술표준원.
이장원, 이민동, 강영희(2006),『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확산과 노사관계에 대한 함의』, 한국노동연구원.
이장원, 이병훈, 권순원, 권현지(2007),『사회적 책임수행을 위한 금융노사의 협력방안 연구』,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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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 노동사회위원회(2007), ‘노동부문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과 시민사회의 역할’, 참여연대 정책토론회 자료.
한국노동연구원(2006), ‘노동?사회 관점에서 본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의 추진방향’, 정책토론회 자료.
ISO(2006), 'Participating in the future International Standard ISO 26000 on Social Responsibility(사회적 책임에 관한 미래의 국제표준 ISO 26000에 동참하기).
ISO-WGSR(2008), ISO 26000 작업초안 4.1판(WD4.1).
ITUC(2007), Statement on the International Organisation for Standardisation (ISO), 제3차 General Council (2007.12.12~14) 결의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