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료제도 부실이 아니라 관료주의 강화가 문제다

노동사회

관료제도 부실이 아니라 관료주의 강화가 문제다

편집국 0 5,076 2013.05.22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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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를 느끼는 노조간부는 관료주의의 함정에 빠진 것일까 아니면 조직시스템의 부실에 허덕이고 있는 것일까? 『노동사회』2006년 4월호에 실릴 "빨간 불 켜진 민주노총의 민주주의"의 문제의식 연장선상에서, '활동가들의 위기'를 서로 다르게 진단하는 목소리를 들어본다. 누가 옳고 그른가를 넘어서 독자들의 고민이 심화되는 데 기여하기 바란다.   -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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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제는 “전문성을 전제로 안정된 집행력을 보장받는 체제”다. 이러한 의미에서 엄격하게 사전적으로 해석한다면, 모든 노조 상근활동가를 노동관료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른바 ‘채용직’들은 노동관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상근노조활동가들의 노동관료화가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어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노조간부 직업화와 대중 수동화의 악순환

무엇보다도 최근 노조 상근자들의 ‘직업화’ 양상이 뚜렷하다. 한 번 노조 주요 임원을 역임한 활동가들, 특히 상급단체 임원을 한 경우 현장으로 복귀하는 경우가 드물 정도다. 교육위원, 정치위원 정도는 양반이고 심지어 없는 자리를 만들어서까지 현장으로 복귀하지 않으려고 하는 현상이 만연해 있다. 일부 직업화된 노조활동가들에게 현장 복귀는 다음을 위한 일시적 준비기 정도로 설정되어 있기도 하다. 조합원들이 노조 상근간부를 기피하는 비제조업의 경우, 몇몇 노조 간부들이 번갈아 가며 상근을 하거나 아예 10년여를 상근간부직을 독점하기도 한다. 이러한 직업화는 필연적으로 ‘권력화’를 가져온다. 일례로 현대자동차의 전직 임원은 무려 2년 동안 회사로부터 업무를 면제받고 온갖 외부활동을 자유롭게 하고 다녔다. 그의 작업대에는 아예 회사가 비정규직을 배치해 줄 정도였다. 이러한 권력화의 정점에 이른 사건이 다름 아닌 취업비리 아니겠는가!

두 번째로 지적되어야 할 것은 이러한 관료들이 대중통제로부터 벗어나서 ‘완전한 자립’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 국가기구 내에서도 대의기구를 통해서 관료들에 대한 통제가 이루어진다. 의회 혹은 국민으로부터 선출된 대통령에 의해 관료들에 대한 통제권이 확실히 주어진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민주노조운동 내에서는 관료화된 노조간부들에 대한 통제가 불가능해졌다. 이는 관료들의 직업화, 권력화 현상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

과거 전노협 시절에는 임투 한 번 하면 임원들이 불신임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설혹 밀실거래 등의 나쁜 짓을 하지 않았어도 대중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 하는 결과를 초래할 때 노조간부들이 대중에 의해 쫓겨나는 경우가 발생했고, 이러한 대중의 힘에 의해 관료들은 대중에 대한 복무를 최우선으로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최근의 양상을 보면 민주노총 내 각종 대의기구는 사실상의 거수기로 전락했다. 치열한 토론과 합리적 결론보다는 ‘표 대결’이 대의기구의 현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표 대결에 의한 표결 결과는 의안이 뭐든 상관  없이 고정되어 있다. 관료들의 자립으로부터 바로 ‘분파성’이 비롯되고 있는 것이다. 대중에 의거하지 않는 관료화의 결과인 것이다!

최근에는 특히 이러한 관료의 자립화가 대리주의를 낳으며 거꾸로 대중을 지배하는 양상으로까지 나타났다. 취업비리 사건이 폭로되기 전까지만 해도 상당수 조합원들이 노조간부들에게 돈을 줘 가며 입사청탁을 하고도 그들에게 고마워했다는 것 아닌가! 이들은 관료적 권력을 매개로 대중을 지배하는 양상으로까지 나아가면서 대중의 수동화를 심화시키고 있다. 또한 이러한 대중통제에서 벗어난 관료의 자립화는 ‘자신들의 입지 중심의 노동운동 전망’을 만들어낸다. 운동의 전망마저 관료화에 갇히는 결과를 빚는 것이다. 현장을 살리려는 전망보다는 노사정 대화에 집착하는 행태, 정치세력화라는 이름으로 노동자를 표 찍고 돈 내는 수동적인 존재로 만드는 문제 등은 운동의 관료적 전망이 낳은 대표적 폐해라 할 것이다.

뿌리박은 대리주의, ‘전문성’만으론 해결 못 해

노동조합 시스템 내에 관료 전문화가 요구되는 지점이 분명 존재한다. 예컨대 정책, 교육, 선전 등의 영역은 분명하게 전문성이 요구되는 영역이라 할 것이다. 이에 대한 전문화를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상근활동가들의 전문성이 다소 부족하다는 지적도 분명한 현실이다. 그러나 지금의 노동운동 위기의 핵심은 대중의 수동화다. 신자유주의 공세로 인한 노동자계급 내의 분절화, 계층화 속에서, 단적으로 얘기해서 “불만은 높으나 투쟁이 되지 않는 상황”인 것이다. 정규직은 정규직대로 비정규직은 비정규직대로 너무도 고통스러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지만, 이것이 ‘운동’으로 표출되고 있지 못하다. 단순히 의제가 협소해서, 전문성 있는 정책 대안이 제출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노동자들은 자기 발등의 문제조차 해결 못 한다. 연대가 안 되는 것은 차치해 두더라도 ‘내 문제’조차 해결 못 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 전노협 시절 현장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대의원, 노조간부들에게 알릴 것도 없이 곧 바로 현장에서 먼저 투쟁을 시작하는 게 당연시 되었다. 그러나 어느 틈엔가 우리의 현실에서는 현장에 문제가 생기면 대의원 혹은 노조간부들에게 알려서 해결하는 대리주의가 당연한 것으로 변질되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노조간부들은 ‘해결사’가 되었고, 그럴수록 대중은 ‘수동화’ 되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인식 없이 ‘대안’을 논의하는 것은 공허하다. 전문성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전에 대중의 능동화를 위해 현장과 어떻게 밀착할 것인가가 보다 우선적으로 고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점은 관료시스템의 개선으로는 극복되는 게 아니다. 현장을 능동화시키는 것이 위기의 일차적 해법이라는 점에서, 관료적 시스템 강화를 통한 운동 위기 해법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노조 상근간부와 시민단체 ‘활동가’는 다르다

이와 관련해서 한 가지 더, 노동운동에서 부지불식간에 일반화되어 있는 ‘활동가’라는 개념에 대한 재정립도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 명칭은 시민운동단체에서 많이 쓰이는 것이다. 참여연대, 환경운동연합 등 시민운동단체들은 예외 없이 ‘활동가-후원회원’의 구조로 조직이 되어 있다. 다수의 후원회원들은 돈을 냄으로써 말 그대로 후원활동에 머물러 있고, 활동가들은 매우 전문화된 지식과 활동능력을 바탕으로 전임활동을 하고 있는 구조다. 실제 일부 시민운동조직 활동가들의 전문역량은 대단하다. 경제감시, 사법감시, 의정감시, 환경감시 등 자기의 영역 속에서 실무를 완전히 꿰고 있을 뿐 아니라 지식의 측면에서도 노동조합 활동가의 눈으로 보자면 주눅들만큼 전문화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델이 ‘대중운동’으로서 노조운동에 맞는 구조는 아니지 않는가! 노조운동은 누가 뭐래도 대중운동이고 그 핵심은 대중들로 하여금 자신의 요구를 중심으로 세상과 맞서는 주체로 세우는 것이다. 그런데 부지불식간에 노동운동 내에서 이러한 시민운동의 구조를 무비판적으로 따라가고 있거나, 심지어 이러한 시민운동의 전문화된 활동가들을 자신의 지향으로 갖는 상근활동가들도 많아지고 있다. 사실은 활동가라는 용어 자체에 그러한 구도가 전제되어 있기도 하다. 관료시스템의 부실을 지적하며, 전문화된 관료를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는 이러한 구도가 전제되어 있다. 이러한 모습을 봤을 때 최근 노동운동이 대중운동이 아닌 상근자들만의 운동으로, 소수의 운동으로 후퇴하고 있다는 느낌까지 갖게 된다.

그러나 시민운동조차 스스로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라는 자기비판을 제기하고 “신자유주의 정권의 관변단체화 되었다”며 자조를 하는 마당이다. 노동운동이 이러한 모델을 지향해서는 안 될 것이다. 노동운동 위기의 해법은 관료적 영역에서 찾아질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본다.

대중의 수동화와 결합된 관료 시스템 속에서는 현실성 있는 정책과 전망이 마련될 수 없다. 설사 마련된다고 하더라도 누가 그것을 실천하겠는가? 오랜 관료화의 후유증으로 더 이상 운동가들이 성장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 현실에서, 대안의 실천은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와 같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이 문제를 도외시하고 “자본보다 뒤떨어지는 실무집행능력, 정책생산 능력 즉 시스템의 비효율성이 문제”라며 ‘구체적 대안’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 자체가 치열한 현장의 투쟁에 결합하려하지 않는 관료들의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젊은 동지들, 두려움 없이 ‘패배’와 맞서 주시오!

1998년 이후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여파로 노동현장은 그 전에 비해서 심각하게 분절되었다. 이 과정에서 대기업 정규직노동자들, 비정규직노동자들과 중소·영세기업노동자들은 각자 나름대로 자본과 권력에 맞서 투쟁했다. 개별투쟁은 치열했지만 각개격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노조관료들은 단위노조, 산별, 민주노총 중앙차원에서 철저히 관료적, 타협적 태도로 일관했으며, 비정규직 개악입법과 로드맵공세로 자본과 권력이 총공세에 나선 지금 백약이 무효한 상황에 이르렀다. 투쟁의 방향, 정책에 대해서는 우리의 현실 속에,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피어린 투쟁과 외침 속에 이미 다 나와 있는 게 아닌가?

신자유주의 세계화 국면은 단위기업투쟁이 아무리 치열해도 각개격파 되고 마는 특성이 있다. 세계적 차원의 자본 공세는 노동자들을 바닥을 향한 질주로 내몰고 있기 때문에 단위기업투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최선을 다해 싸우다 깨어진 투쟁은 무의미한 건가? 1997년 12월 IMF 이후 우리는 ‘이기는 투쟁’을 해본 일이 없다. 그래서 관료들은 현장의 투쟁을 풀기위해서 협의테이블에 들어갔고, 들어가려 하고 있다. 젊은 동지들이 바로 이 지점의 난제와 두려움 없이 맞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1980년 5월의 광주는 비참하게 깨어졌다. 그런데 그것이 무의미한 투쟁이었는가?

  • 제작년도 :
  • 통권 : 제11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