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파시즘의 위협과 노동자계급
앞에서 파시즘의 ‘개념의 명확화’를 위한 다양한 견해들을 살펴보았거니와, 파시즘은 제1차 세계대전과 뒤이은 ‘혁명적 위기’ 상황에서 그것에 대한 반동으로 대두하였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파시즘 대두의 직접적 바탕이 되었다기보다는 파시즘이 탄생할 수 있는 문화․사회․정치적 계기를 제공한 것이죠.
우선 문화적으로 볼 때, 전쟁 때문에 미래에 대한 낙관적이고 진보적인 전망이 상실되었고, 인류의 자연스러운 조화에 대한 자유주의 상상에도 의혹이 드리워졌습니다. 또 사회적으로 볼 때, 전쟁은 불안에 떠는 퇴역군인들(그리고 그들을 뒤따르는 젊은 형제들)을 양산했는데, 이들은 낡은 법이나 도덕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분노와 환멸을 표현할 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전쟁이 기존제도 ―자유주의건 보수주의건 간에― 가 지닌 역량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커다란 사회․경제적 긴장을 불러일으켰습니다(Paxton, 2005: 28).
이념의 측면에서 보면, 파시즘은 사적 소유에 대항하고 계급해방과 인간해방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노동자계급을 주체로 내세우고자 하는 사회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났죠. 유럽의 지배계급은 노동자계급을 기존의 사회․정치적 구조 안으로 편입시켜 공산주의의 가능성을 막아내기 위해 여러 가지 방편을 동원했습니다. 한편,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는 이러한 봉쇄 정치의 일환으로 의회 민주주의를 고수하면서 ‘국민적 통합’을 강조하였죠.
이와 같은 상황에서 파시즘은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의 배격과 노동운동의 말살을 목적으로 광범한 대중을 동원하고자 했어요.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전혀 다른 정치적 기획을 목적으로 했는데, ‘급진적 반동’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파시즘은 반동적 문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새로운 방식, 즉 대중을 반사회주의․반공산주의 기획에 동원하는 방식을 통해 형성되었습니다(네오클레우스, 2002: 30).
파시즘이 태어나는 데 필요한 주요 전제조건의 하나가 문화적 뿌리였습니다. 파시즘은 개인의 자유, 이성, 자연스러운 인류의 조화, 진보에 대한 믿음이라는 자유주의 신념에 맞섰던 19세기 후반의 반발이었습니다. 1914년 훨씬 이전부터 새롭게 유행한 반자유주의 가치, 더욱 공격적인 민족주의와 인종주의, 그리고 본능과 폭력에 대한 새로운 미적 태도에서 파시즘이 싹을 틔우는 데 필요한 지적․문화적 토양이 생겨나기 시작하였죠(Paxton, 2005: 32).
파시즘 문화에 담겨 있는 이데올로기는 반지성주의, 민족과 국가에 대한 강조, ‘구성적 인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반지성주의 경향은 신비주의 또는 허무주의와 맥락을 함께하면서 형성되었죠. 반지성주의는 비판적․사회적 역할을 강조하였던 자유주의․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거부했으며, 이를 통해 파시즘은 맹목적인 군중을 끌어들이려는 이데올로기적 목적을 쉽게 관철시킬 수 있었습니다.
파시즘의 반지성주의는 일차적으로 당시 적대적이었던 관계를 맺고 있던 마르크스주의를 거부하는 데서 나온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반지성주의 이념은 지적이지 않은, 단순한 ‘노동자’를 끌어들이려는 전략적 차원에서 나온 ‘사악한 정치전략’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김수용 외: 2001: 102, 104).
파시즘 이데올로기의 하나가 ‘운명 연관성’을 강조하는 민족 개념인데, 독일 파시즘은 민족이라는 개념을 매우 높은 상위 개념으로 올려놓았죠. 그 개념은 배타적 애국주의라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관철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무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파시즘이 바탕을 두고 있는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는 니힐리즘을 극복하는 ‘구성적 인간’에 대한 요청입니다. 파시즘은 역사적 과정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니힐리즘을 비판하면서 그 대신 새로운 ‘건전성’을 내세웠죠. 즉, 역사에 대한 거부가 니힐리즘의 특징이라면, 파시즘은 ‘역사’에 대한 새로운 낙관주의적 요청을 내세운 것입니다. 니힐리즘의 극복과 동일한 맥락에서 요청된 ‘구성적 인간’이란 바로 숭고함과 영웅성을 지닌 인간에 대한 요청을 뜻하죠. ‘새로운 인간’에 대한 요청 뒤에는 타 민족에 대한 배척과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호전성의 이데올로기가 도사리고 있었죠(김수용 외: 2001: 112~114).
지금까지 파시즘 탄생의 직접적 배경과 계기, 그리고 전제조건에 관해 살펴보았거니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도래한 ‘분노의 시대’와 ‘혁명적 상황’을 배경으로, 헝가리를 비롯하여 오스트리아, 폴란드, 불가리아, 루마니아, 스페인, 영국, 핀란드, 프랑스, 일본, 그리스, 그리고 중동부와 중유럽 국가들에서 반동 독재 권력이 수립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의 산물인 파시즘은 1929~1932년의 경제대공황에 따른 자본의 심각한 곤란으로 강한 충동을 받게 되었죠.
파시즘이 최초로 정권을 장악하게 된 것은 1922년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 독재 권력의 수립이었습니다. 그 뒤 1933년 히틀러가 독일에서 권좌에 오르면서 파시즘의 돌진은 폭력적이고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죠. 이러한 파시즘의 득세를 계기로 하여 거대 부르주아지의 반동은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자신들의 영향권 안으로 재편하려 하였습니다.
현실에 비추어 본다면,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정치제도를 반동적으로 개조하려는 강력한 지향은 훨씬 이전부터 준비된 것이었어요. 특히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 진전은 부르주아지로 하여금 자신들의 지배를 유지․강화하기 위한 권력의 장악을 추구하도록 만들었죠. 말하자면 지금까지 시행되어 온 사회통치의 형태는 별로 유효하지 않은 것으로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파시즘은 ‘획일적 통합(gleichschaltung)’이라는 선동적인 구호를 앞세웠습니다. 그것은 소극적으로는 지배체제에 대해 거점이 될 수 있는 크고 작은 민중의 모든 자주적 집단의 형성과 유지를 저지함과 동시에, 적극적으로는 대중매체를 총체적으로 동원함으로써 인민대중의 생활양식까지도 획일화의 대상으로 삼으려 하는 지향을 칭합니다. 요컨대 이질적인 것을 배제함으로써 강제적인 동질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것이며, 이 과정에서 강요된 ‘민족공동체’의 보증을 목적으로 국가 권력 장치는 정치의 도구로서 세련된 모습을 갖게 되죠.
결국 이러한 구조를 통해 파시즘의 지배가 실현되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런 지배도구가 아이러니컬하게도 구조적으로는 국가의 미(美)라는, 옛 시민계급의 꿈을 현실 정치에서 관철하고자 함으로써, ‘종합예술작품’과도 같은 파시즘적 시민국가의 이데올로기를 창출하였다는 사실입니다(김수용 외, 2001: 37~38).
서유럽에서 전개된 파시즘의 진전은 전체적으로 고양과 후퇴를 거듭하면서 파상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최초의 진전은 1919~1923년에 진행되었어요. 자본주의의 상대적 안정기에는 파시즘의 팽창이 중단되지는 않았으나,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그다지 유력한 형태를 취하지는 않았습니다. 파시즘의 제2의 물결은 1929~1933년의 세계경제공황을 맞아 높아졌습니다. 특히, 1933년 1월 독일에서 이루어진 파시즘의 권력 장악은 유럽 대륙에서 파시즘화의 과정에서 강력한 촉진제가 된 경우였죠.
초기 단계에서 파시즘은 광범한 프티 부르주아 층이나 계급탈락분자, 청년층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굴욕 당하고 모욕 받은 자”의 이익을 지키는 투사의 탈을 쓰고 민족주의 개념을 계급의 개념과 교묘하게 결합시켰습니다. 이와 함께 파시즘은 요란한 약속과 극적인 효과, 그리고 배타적 애국주의 선전을 통해 ‘밑으로부터의’ 운동으로서, 또는 반자본주의적 운동으로까지 자처하였죠. 파시즘은 이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자마자 가장 반동적인 거대독점 부르주아지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집단의 권력으로서의 계급적 정체를 노골적으로 드러냈습니다(USSR Academy of Sciences, 1985 Volume 5: 268).
노동자계급과 그 정치․경제적 조직이 파시스트가 자행하는 테러의 주요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잔인하고 교활한 면에서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운, 신(新) 카베냐크 무리가 어떠한 계급적 배경을 갖고 있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었죠. 파시스트 지도자들은 노동운동과 국제사회주의운동에 대해 일관된 증오심을 드러냈고,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무너뜨리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뒷받침한 것은 다름 아닌 제국주의 열강과 거대 부르주아 세력이었어요.
1931년 11월 독일 경찰이 압수한 나치당의 문건 ―나치의 테러 계획을 담은 ‘복서하임 문서(Boxheim papers)’― 을 보면, 나치 전략가들이 다른 많은 독일인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혁명을 예견하고 있었으며, 그것에 대항하는 직접행동을 계획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나치 지도부는 1931년 당시 혁명운동에 강력히 대항하는 것이 국민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길이라고 확신하였죠(Paxton, 2005: 105).
이러한 파시즘 운동에 대해 거대 부르주아지가 일찍부터 두터운 지지를 보내고 있었던 것은 잘 알려진 일입니다. 이런 지지는 정치적 공감의 표명에서부터, 물질․정치적인 직접 지지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죠. 이를 테면 1922년 이탈리아에서 파시스트 조직이 소유하고 있던 자금의 대부분이 기업가와 대지주의 자발적인 기부금 형식으로 조성되었습니다. 그 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국가와 독점자본과의 관계는 굳건하고 안정적이었죠.
독일의 경우, 파시스트 운동은 1920년대 중반부터 대공업자본과 대금융자본의 지지를 받았어요. 1930년대 초부터는 파시스트가 티센, 플릭, 슈뢰더, 샤흐트 등의 지원을 발판 삼아 라인 베스트팔렌 중공업 기업주로부터 지원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막대한 자금이 선거전이나 돌격대의 무장 유지를 위해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SDAP)’의 금고로 흘러들어갔죠. 1932년 가을에는 독일 중공업의 주요 그룹 대부분이 정부 부처의 지도적 역할을 히틀러에게 맡겨야 한다는 요구를 제기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한편, 파시스트가 노동자계급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은 결코 아니었어요. 독일의 나치당은 자기들이 이름부터 ‘노동자의 당(Arbeiterpartei)’임을 내세웠고, 무솔리니는 지난날의 사회주의자 동지들을 끌어들일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죠.
초기 파시스트 정당의 사회적 구성에 대한 분석은 한 가지 점에서 일치합니다. 바로 일부 노동자들이 파시즘 정당에 호감을 가진 것은 사실이었지만, 정당 구성원에서 노동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언제나 전체 인구에서 노동자가 차지하는 비율보다 훨씬 낮았다는 것이죠. 그러나 어쩌면 이 소수의 파시스트 지지 노동자들만으로도 충분했을지 모릅니다. 파시스트 정당이 노동자들을 일부라도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파시스트 폭력이 타협하지 않은 나머지 노동자들을 다스리는 구실을 삼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파시스트에 대한 반동세력 지지의 보상이었죠.
파시즘이 제공한 또 하나의 위세는, 그들 스스로가 가세하여 만들어낸 무질서를 효과적으로 극복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할 수 없게 만들고, 입헌 국가의 신임을 떨어뜨릴 목적으로 폭도를 풀어놓았던 나치와 이탈리아 파시즘 지도자들이, 이제 질서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비(非)사회주의 세력임을 자처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요컨대 파시스트들은 좌파와 권력을 나누지 않고도 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정권을 유지해나갈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였습니다. 이 방법은 반동세력의 사회․경제적 기득권이나 정치적 지배권에 대해 위협을 가하지도 않았죠. 사실상 부르주아지와 보수 기득권 세력은 그들 나름대로 권력의 문을 여는 열쇠를 쥐고 있었습니다(Paxton, 2005: 103~104).
특히 거대 자본가들이 세계경제공황기에 파시즘을 거리낌 없이 지지하고 포용하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즉, 그 하나는 파시스트당이 노동운동과 혁명운동을 탄압할 태세를 확고히 갖추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파시스트당이 광범한 대중들을 상대로 한 이데올로기적인 기만 술책을 가지고 좌익 급진적 감정을 없앨 수 있는 정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거대 자본가들은 현재의 의회제도가 위기에 놓인 상태에서 대중에 대한 통제력을 잃게 된 것을 우려한 나머지, 자신들의 지배력 유지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기반의 확대․강화를 위한 방편을 파시즘에서 찾았습니다.
이와 같은 파시즘 위협의 증대는 국내외적인 정세와 계급 세력들 사이의 역관계, 그리고 정치적 전통과 구조 등에 따라 규정되었죠. 정치적으로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국가들에서는 부르주아지가 굳이 테러와 폭력적 방법에 의존하기보다는 사회․정치적 방책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방책의 고전적 사례는 1933년 집권한 미국의 대통령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이었죠. 앞에서도 살펴본 바 있거니와, 루즈벨트 대통령은 경제대공황을 맞아 미국의 사회․경제 구조를 ‘혁신’하고, 노동법을 대폭 개정했으며, 근로대중에게 효과적인 원조를 제공함으로써, 경제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몇몇 국가들에서는 부르주아지가 개량주의적 사회민주당 지도자를 수반으로 하는 ‘노동자 정부’를 수용하였죠. 예컨대 영국의 1929~1931년에 걸친 제2차 맥도널드 노동당 정부, 덴마크의 1932~1940년에 걸친 트로발 스타우닝 정부, 스웨덴의 사회민주당 내각 등이 그것이었습니다. 또한 부르주아지는 부르주아 정치가를 수반으로 하는 이른바 거국일치 정부 또는 연립정부(벨기에, 네덜란드)에 사회개량주의당의 대표자를 받아들이기도 하였습니다.
부르주아 개량주의는 1930년대 대단히 긴박한 정세와 사회주의운동이 고양되는 조건에서 새로운 특징을 드러냈습니다. 부르주아 국가의 사회적 기능이 확대되고 그 기능이 점점 복잡해졌죠. 그 결과 ‘사회적 파트너십’에 관한 우익 사회주의 이론을 유산자계급이 받아들이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는 사회개량주의자의 투쟁 슬로건인 ‘민주정치’, ‘완전고용’, ‘소득의 재분배’, ‘소유에 대한 참가’ 등을 점점 차용하였습니다. 부르주아지의 이러한 사회적 전략이 목표로 한 것은 독점체와 금융과두제의 무제한적인 정치지배를 덮어 가리고, 노동운동을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파트너로 삼아 자본주의 체제 유지를 온전하게 하려는 것이었죠(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5 Volume 5: 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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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 연표>
1867년•미국에서 백인 우월주의 집단인 ‘KKK(Ku Klux Klan)’가 창설된다. KKK는 기능적으로 파시즘과 관련된 최초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KKK의 창시자들은 국가가 공동체의 정당한 이익을 지켜주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흰 가운과 모자로 제복을 차려 입고, 자신들의 운명을 위해 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신념으로 무장하였다. 이들의 주장은 파시즘 운동이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의 유럽에서 기능하는 방법을 미리 보여준 일종의 예고편으로 평가받는다.
1894년•1906년까지 프랑스 전역을 뒤흔든 ‘드레퓌스 사건’이 일어나다. 이 사건은 당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전역에 일고 있던 심각한 반(反)유대주의와 민족주의 정서, 계급갈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1911년•프랑스에서 ‘프루동 모임’을 통해 국가사회주의(National Socialism)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다. 이 모임은 ‘유대 자본주의’에 대한 비난을 둘러싸고 ‘민족주의자와 좌익 반민주주의자’를 통합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연구회였다. 모임을 주도한 조르쥬 발루아는 한때 ‘악시옹 프랑세즈(Action Franḉaise)'에서 활동했는데, 과격한 민족주의․반공화주의 단체인 악시옹 프랑세즈를 진정한 파시즘의 첫 번째 운동으로 여기는 이들도 많다.
1914년•6월28일,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청년의 손에 살해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1917년•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나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고 로마노프왕조가 막을 내리다. 뒤이어 ‘10월 혁명’이 일어나서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은 유럽의 상류층과 중간계층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새로운 힘을 주었다. 그러나 러시아 이외의 다른 곳에서는 혁명이 성공하지 못했고 유럽은 자유주의, 보수주의, 사회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여러 ‘이즘’들이 각축을 벌이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사회주의에 대한 공포는 파시즘의 등장과 세력 확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18년•1월8일,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내용으로 하는 14개 조항을 발표했다.•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해체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가 독립을 선언했으며,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에서도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919년•공식적으로 ‘파시즘’이 탄생했다. 1919년 3월23일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는 밀라노의 산세폴크로 광장에서 약 100명이 모인 가운데 “사회주의와 전쟁을 선포”하였다. 이 때 무솔리니는 자신들의 운동을 ‘전투자동맹’ 이라는 뜻의 ‘파시 디 콤바티멘토’(Fasci di Combattimento)라 불렀다.•6월28일, 제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하는 조약으로 베르사유 강화 조약이 체결되었다.•8월11일, 독일에서 ‘바이마르 헌법’이 공포되었다•9월12일,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모험가, 군인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피우메(Fiume)를 점령했다. 단눈치오는 이듬해 1920년 12월까지 피우메를 통치했는데, 무솔리니는 훗날 이 시기에 단눈치오가 점령지에서 행한 제복 차림의 행진과 팔을 쭉 뻗는 식의 ‘로마식 경례’, 구호 외치기 등을 모방하여 활용했다.
1920년•11월21일, 이탈리아에서 ‘포(Po) 계곡 사건’이 일어났다. 1차 세계대전 후 실시된 첫 선거(1919년 11월)에서 승리를 거둔 이탈리아 사회주의자들이 포 계곡의 거대한 농촌 지역을 장악하면서, 지주들의 불만이 커졌다.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조합을 통해 농장주들을 압박했고, 이에 위협을 느낀 지주들은 공공당국의 무관심 상태에서 파시스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 결과 1920년 11월21일부터 파시스트 행동대가 밤마다 지역 사회주의 사무실들을 약탈하고 불태우기 시작했다. 포 계곡의 ‘검은 셔츠단’은 소작농들에게 일자리와 농토를 제공하고 지주들의 편의도 보아주면서 점차 세력을 확장해나갔다.•2월24일, 독일 뮌헨의 한 맥주홀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일명 나치당)’의 출발을 선언했다.
1921년•11월,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새로운 강령을 통해 파시즘 ‘운동’에서 ‘국가파시스트당(PNF)'이라는 정당으로 변신을 선언했다.
1922년•10월 말, 무솔리니가 ‘로마 진군’을 통해 총리직에 오르면서 최초의 파시즘 체제가 탄생했다. 이로써 사회주의자와 자유주의자가 이끌던 의회정치 체제가 막을 내리고, 파시즘 통치가 시작되었다. 로마 진군은 파시즘의 위협 앞에 공권력이 굴복함으로써 합법적으로 이루어진 권력이양이었다.
1923년•11월18일, 무솔리니의 로마 진군에 감명을 받은 독일의 히틀러가 뮌헨의 맥주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다음날 바로 시위대와 함께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5년 징역형을 받았으나 8개월 만에 석방되었다(이때 감옥에서 『나의 투쟁(Mein Kampf)』이라는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히틀러는 지방의 정치가에서 전 국민의 관심을 받는 인물로 떠올랐다.
1924년•6월10일, 이탈리아 사회당의 자코모 마테오티 서기장이 과격파 파시스트들에게 납치, 살해당했다. 이 사건은 무솔리니 정권의 잔인함을 보여준 것으로 국내외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반대 세력들이 항의의 뜻으로 의회에서 자진 사퇴하는 등 무솔리니가 정치적으로 곤경에 빠지는 듯 보였으나, 무솔리니는 오히려 이 기회를 이용해 1925년 1월 일당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1929년•10월24일, 미국 뉴욕 주식시장에서 주가가 대폭락하면서 ‘대공황’이 시작되다.
1932년•7월, 포르투갈의 카르모나 대통령이 경제학 교수 출신 아토니우 데 올리베이라 살라자르를 총리로 임명했다. 집권 초에 포르투갈에서 가장 강력한 파시즘 조직을 뿌리 뽑아버린 살라자르는, 잠시 동안 국가 통합을 위해 파시즘적 수단 -조합주의 노동조직, 청소년 운동(포르투갈 소년단 Mocidade Protuguesa), 유명무실한 ‘유일당’이며 당원들이 푸른 셔츠를 입었던 포르투갈 군단(the Portuguese Legion) 등- 으로 ‘새로운 국가(Estado Novo)' 체제를 강화하려 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살라자르 정권은 반파시즘적이었다.•7월31일, 독일 총선거에서 나치당이 37%의 지지를 얻어 제1당이 됐다.•8월, 독일 슐레지엔에서 ‘포템파 사건’이 일어나다. 이는 5명의 나치 돌격대원들이 슐레지엔의 포템파에 사는 폴란드계 공산주의 노동자를 살해한 사건이었다. 당시 나치당은 정부에 압력을 행사해 살인범들이 받은 사형 선고를 무기징역으로 감형시켰다. 포템파 사건은 내부의 적을 겨냥한 폭력이 합법화되는 파시즘 폭력의 본질을 뚜렷이 보여주었다.•11월, 미국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33년•1월, 독일의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했다.•2월28일, 베를린에서 ‘독일제국의회 의사당 방화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이 공산주의자의 소행으로 밝혀지자 히틀러는 공산혁명에 대한 공포심을 이용해 수권법(授權法)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이로써 히틀러는 독재체제를 확립하게 되었다(3월27일).•3월,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뉴딜 정책을 시작했다.
1934년•6월30일, 독일에서 ‘긴 칼의 밤’ 사건이 일어났다. ‘긴 칼의 밤’은 히틀러가 자신의 통치에 방해가 되는 에른스크륌을 비롯한 나치 돌격대 내의 과격파들과 몇몇 보수파 인사, 군 장성 등을 잔인하게 살해한 사건이었다. 150~200명이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건 이후 히틀러에게 의구심을 품고 있던 이들은 모두 입을 다물게 되었다.•8월, 독일의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히틀러가 총통 및 총리 자리에 올랐다.
1935년•9월15일, 독일에서 인종차별법인 ‘뉘른베르크 법’이 선포됐다. 뉘른베르크 법은 이민족 간의 결혼을 금지하고, 유대인들에게서 시민권을 박탈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10월3일, 이탈리아가 팽창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에티오피아를 침략했다. 이탈리아는 1936년 5월 마침내 에티오피아를 병합하는 데 성공했다. 에티오피아를 침략하면서 무솔리니는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국제사회에서 신뢰를 잃었으나 대신 국내에서 열광적인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1936년•7월, 스페인에서 내란이 일어나다. 2월 총선에서 정권을 잡은 좌파 인민전선 정부(제2공화정)에 대항해 국가주의자들(파시스트, 군부 세력, 로마 가톨릭 교회, 토지 소유자, 기업가 등)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반란 세력은 10월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을 국가 주석으로 추대했으며, 독일과 이탈리아는 11월에 프랑코 정권을 승인했다. 내란은 1939년까지 지속되었는데, 국제적으로 보수주의자․파시즘 이탈리아․나치 독일이 프랑코 장군의 반란 세력을 지원했고, 미국과 유럽 각국, 소련은 공화파를 지원했다.•10월25일,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로마-베를린 추축’을 결성했다.•11월25일, 독일과 일본이 소련에 대항하기 위한 ‘반(反)코민테른 협정’을 체결했다.
1938년•3월, 독일, 오스트리아 병합•9월,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가 ‘뮌헨 회담’ 개최. 뮌헨 협정에 따라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 서쪽의 수데텐 지방을 합병하였다.•11월, 독일에서 9일 밤부터 10일 새벽까지 ‘수정의 밤(Kristallnacht)'사건이 일어났다. 하룻밤 동안 독일 전역에 있는 유대인들이 급진적 나치당원들로부터 습격을 받아, 수백 채의 유대교 회당이 불타고, 7,000여 개의 유대인 상점이 파괴되었으며, 2만여 명에 이르는 유대인이 수용소로 보내졌다. 또 91명의 유대인이 즉결 처형당했다.
1939년•스페인의 프랑코 장군이 내란에서 승리했다. 프랑코의 권위주의 독재정권은 그가 사망한 1975년까지 지속되었다.•9월1일, 독일이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1940년•5월과 6월에 네덜란드와 노르웨이가 차례로 독일에 항복했다. 6월14일에는 독일군이 프랑스 파리에 입성, 22일에 독불 휴전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프랑스에서는 제3공화정이 끝나고 친독 정권인 비시(Vishy) 정권이 수립되었다.•6월10일,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대연합국 선전포고를 발령하고 전쟁에 뛰어들었다. 무솔리니는 이후 히틀러와 대등함을 과시하기 위해 침략 전쟁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승리를 쟁취하지 못한 채 오히려 대중의 열광과 인기를 잃어버렸다.•9월27일,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의 ‘3국 조약’이 조인되었다. 이로써 2차 세계대전의 추축국이 결성되었다.
1941년•4월, 독일이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침략했다.•6월, 독소 전쟁 시작•12월,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일어났다.
1943년•7월, 연합군이 이탈리아 시칠리아에 상륙했다. 히틀러와 제휴한 것이 큰 화를 불러올 것이 분명해지자, 왕당파와 반대파 파시스트들이 국왕 엠마누엘레 3세로 하여금 무솔리니를 파면하고 체포하게 하였다(7월25일). 그 뒤 이탈리아는 연합군에게 항복을 선언했다(9월).•9월12일, 히틀러가 특공대를 보내 감금되어 있던 무솔리니를 구출했다. 히틀러는 무솔리니를 살로 지역에 세운 새로운 파시즘 공화국(‘이탈리아 사회주의공화국’)의 독재자 자리에 앉혀주었다.
1944년•6월 6일,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
1945년•4월28일, 무솔리니가 독일군 차량에 숨어 탈출하려다 이탈리아 파르티잔에게 발각되어 사형당했다.•4월30일, 히틀러가 베를린의 총통 관저 지하 은신처에서 자살했다.•5월7일, 독일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8월6일과 9일,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역사상 최초로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결국 일본은 8월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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