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노동자들에게 파업 권하는 사회

노동사회

언론노동자들에게 파업 권하는 사회

편집국 0 3,504 2013.06.06 04:27

우리사회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은 대중적으로 지지받기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의 파업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언론에서 사용하는 대표적인 틀 짓기(framing)의 사례다. 틀 짓기는 인지적 무의식에 작동하여 ‘의도된’ 효과를 야기한다. 그 효과란 문장의 주장에 대한 자동적 수용 내지는 동의다. 사실 앞에서 인용된 문장은 꼼꼼히 따져 읽으면 그 자체로는 이해되기 어렵다. “파업을 원하지 않는다.”고만 할 뿐, ‘왜’ 원하지 않는지 이유가 제시되지 않기 때문이다. 문장이 의식 수준에서 제대로 이해되려면 원인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틀 짓기가 된 문장은 원인 제시 없이도 이미 형성돼 있는 특정한 해석의 틀과 맞물려 의미를 생성하고 앞에서 언급한 ‘효과’를 발휘한다.

이 문장이 발휘하는 틀 짓기 효과는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우리’와 ‘그들’이라는 이분법에서 시작한다. 이러한 이분법 속에서 ‘우리’라는 범주는 ‘그들’이라는 대상화된 타자를 바라본다. 바라보는 ‘우리’는 대상화된 타자들의 행위를 판단하는 전지적 위치에 선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들’의 파업은 우리에게 불편함을 초래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들, 즉 노동자들에게 파업은 권리다. 그러나 틀 짓기 효과를 통해 파업은 이분법적으로 판단하고 해석할 수 있는 행위로 전락하게 된다. 경제성장에 압도된 근대화 속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을 바라보는 지배적인 시각은 이와 같이 구성되었으며, 파업을 바라보는 지배적인 미디어의 재현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들의 파업을 원하지 않는다

2011년 12월23일 국민일보 노조의 파업을 필두로 언론 노동자들의 연쇄 파업이 시작됐다. 2012년 1월30일 서울 MBC 노조 파업, 3월6일 KBS 노조 파업, 8일 YTN 노조 파업, 12일 지역 MBC 노조 파업, 15일 연합뉴스 노조가 파업했다. 언론사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번 파업의 가장 큰 이유는 ‘편집권 독립’이라고 할 수 있다. 국민일보는 조용기 목사 가족의 간섭과 사유화를 저지하기 위해 파업을 했고, MBCㆍKBSㆍYTN은 이명박 정부가 언론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파견한 김재철ㆍ김인규ㆍ배석규 사장을 퇴진시키고 편집권을 보장받아 방송의 신뢰성을 회복하려고 파업을 했으며, 연합뉴스도 박정찬 사장과 경영진에 의한 편집권 침해를 저지하기 위해 파업을 했다.

이 연쇄 파업은 경영진에 의해 저질러진 편집권 침해로부터 ‘언론의 자유’를 회복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이 파업에 대중들은 지지를 보냈다. 이명박 정부의 언론장악을 뼈저리게 체험한 대중들은 블로그,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파업을 지지했다. 최근에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중들이 이처럼 지지를 보낸 경우가 있었는가 싶다. 파업 중인 언론사 노조는 콘서트를 개최하여 큰 호응을 얻기도 하였다. 지배적인 미디어 재현의 구성인 ‘우리’와 ‘그들’이라는 구별, 즉 파업을 원하는 주체와 파업을 원하지 않는 주체의 간극이 사라졌다. 과거에도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각계각층에서 지지성명을 내기도 했지만, 일반대중들이 큰 호응을 보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그들을 ‘이해’하게 된 것인가.

‘언론의 자유’인가 ‘자유로운 언론’인가

  ‘언론의 자유’인가, ‘자유로운 언론’인가. 동어반복처럼 보이는 이 문장은 두 가지의 중요한 가치를 함축하고 있다. 전자의 질문에 담긴 자유는 헌법에 명시된 언론ㆍ출판의 자유를 말한다. 후자가 포괄하는 것은 언론이 누리는 자유다. 이러한 구분은 단순해 보이지만 해석의 어려움을 낳는다. 자유주의라는 정치적 이념이 작동하는 사회구성체에서 전자와 후자는 모두 도덕적 기준에 부합한다. 헌법은 언론ㆍ출판의 자유는 물론이고, 국민의 권리로서 자유를 승인한다. 그런데 ‘자유로운 언론’은 정말 가능한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이전에 언론이 수행하는 사회적 기능이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다. 언론의 대상은 누구이고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작동하는지를 해명해야, 언론이 가진 자유가 무엇인지 규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언론학자의 말을 빌리면, 언론은 대중 일반에게 사회적으로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면서, 작게는 개개인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기능하고, 크게는 집단 간 혹은 사회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기능한다. 즉 언론은 사람들에게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돕는다. 여기에서 ‘언론의 자유’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언론은 사회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정보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하며, 해당 정보는 왜곡, 축소, 은폐 없이 전달되어야 한다. 언론에서 제공되는 정보가 왜곡되거나 축소, 은폐된다면, 사람들은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의사소통을 하게 된다. 때문에 언론의 자유는 민주정부의 덕목으로도 평가받는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언론노조의 파업은 언론사의 경영권을 쥐고 있는 인사들이 언론사가 제공하려는 정보에 지나치게 개입을 하기 때문에 이를 저지하기 위해 벌이는 투쟁이며, 정치권으로부터 언론의 자유를 되찾으려는 투쟁이다. 그동안 정부는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언론을 통제 및 장악해왔다. 한편, 근현대 정치사에서 언론은 정권에 기생하며 자신들의 배를 불려왔고, 선출되지 않은 권력으로서 통제받지 않는 자유를 갖고 존재했다. 그래서 언론노조의 파업과 투쟁은 늘 정권과 자본으로부터 언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목적에서, 즉 ‘자유로운 언론’을 ‘언론의 자유’라는 권리와 의무 아래 통제하기 위해 시작됐다. 자유로운 언론은 자유를 기득권 집단의 이익을 위해 배치하며, 언론의 자유는 사회구성체의 보편적 가치 수호를 위해 배치된다. 따라서 언론의 자유는 필요하지만 자유로운 언론은 불가하다.

언론의 자유를 위한, 자유로운 언론에 대한 반대

지금 진행되고 있는 언론노조의 파업은 경영진으로부터 편집권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언론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아래서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자본가는 노동계급을 착취한다.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 노동계급은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팔 수 밖에 없다. 사회적 삶의 재생산을 위해 자본가에게 노동력을 파는 노동자들은 해고되면, 노동력을 판매할 자유를 박탈당하게 된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계급은 ‘노동력을 판매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노동자를 착취한다. 자본가계급은 노동자들을 ‘해고할 수 있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에게 있어서 해고라는 자유의 박탈 상태는 삶을 재생산할 수 없기 때문에, 저임금 상태에서도 강도 높은 노동을 지속할 수밖에 없다. 노동자들의 파업은 이러한 불합리한 상황에서 자신들의 삶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다.

자유에 의한 자유의 침해. ‘언론의 자유’는 ‘자유로운 언론’에 의해 침해된다. 정부가 인사권을 행사하고 정권의 입맛에 맞는 사장이 임명되면, 정권에 유리한 보도가 나갈 수 있다.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언론사의 경우 사주의 입장과 반하는 보도는 나갈 수 없다. 경영진에 의한 편집권 침해는 언론 자유의 박탈 상태다. 언론 노동자들은 편집권 독립, 언론의 자유를 위해 투쟁한다.

이렇듯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두 가지의 투쟁들 중에서 언론 노동자들의 투쟁이 더 대중적 지지를 받기 쉽다. 자유로운 언론보다 언론의 자유가 사회적으로 가치 있기 때문이다. 언론의 자유는 민주주의 사회의 전제이기 때문에, 언론 장악 저지의 정당성은 쉽게 제공된다. 그러나 언론사 구성원들 모두가 언론의 자유를 수호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언론사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이해관계가 나뉘고, 경영진에 우호적인 사람도 있으며 노조에 우호적인 사람도 있다. 대한민국 언론의 역사에서는 언론의 자유가 지켜지기보다 자유로운 언론 상태로 방치된 기간이 길다. 모든 언론인들로 일반화시킬 수는 없지만, 언론인들은 언론 자유의 수호 책무를 방치했다는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파업과 대중의 만남의 장, ‘파업 콘서트’

조용기 목사 일가가 소유하고 있는 국민일보를 제외하고, MBCㆍKBSㆍYTN 방송 3사와 연합뉴스의 파업은 현 정부의 언론장악 저지 및 공정보도를 위한 투쟁이다. 국민일보의 경우도 경영진에 의한 편집권 독립을 위한 투쟁이다. 이 파업의 특징은 콘서트를 병행했다는 점이다. 가두행진, 집회, 농성 등의 전술과는 달리, 콘서트는 대중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파업 콘서트’에 유명인사와 연예인들이 출연하면, 이들을 보고자 많은 관객이 몰려든다. 유명인들은 이 자리에서 파업을 지지하고 관객들은 이에 호응한다. 그리고 SNS를 통해 공연 내용과 유명인들의 파업 지지 발언이 확산된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을 통해 언론노조의 파업은 지지를 받았고 이러한 지지는 계속해서 확산되었다.

이를 통해 언론노조의 파업은 대한민국에 거주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이 와중에 MBC 사장은 파업인력을 대체하기 위해 프리랜서 앵커와 계약직 기자를 채용했고, 이에 MBC의 아나운서들이 단체로 검은 옷을 입고 항의하기도 했다. 이 항의는 ‘블랙 시위’라는 이름으로 보도되었다. 콘서트와 블랙 시위를 바라보며, 대중들이 주목하는 것은 그 참여자들의 대표성이다. 미디어에 등장하는 유명인사와 연예인은 물론이고, 아나운서들에게도 대중들은 관심을 보낸다. 이들은 말 그대로 ‘공인’이다. 미디어를 통해 대중들과 친숙해진 이들은 파업 현장으로 대중들을 부른다. 그러나 유명인과 대중이라는 관계는 파업의 목적보다 이들의 행위 자체에 초점을 맞추게 한다.

파업 콘서트의 경우 연예인의 출연 여부가 ‘흥행’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세간의 주목을 끌며 무언가 큰 변화를 가능하게 할 것 같았던 파업은 기간이 길어지면서 다소 정체된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목적으로 이끌어야 할 도구가 주인공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의도한 사람은 없다. 다만 파업이 목적 지향보다 행위 지향으로서 대중들에게 현상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번 파업의 목적은 명확하다. 정권이 임명한 소위 ‘낙하산 사장’의 퇴진과, 특정인에 의한 언론사 사유화 저지이다. 이 목적을 위해 언론노조는 파업을 했고, 여기에 뜻을 같이 했기 때문에 유명인들이 지지를 보낸 것이다. 대중들 또한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방송사 사장들은 정권의 의도에 의해 임명되었기 때문에 노조의 뜻에 따를 수 없다. 노조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정권의 뜻을 거역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파업 장기화, 구조개혁으로 돌파구를 찾아야

언론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으로부터 독립이 선결해야 할 최우선 과제다. 언론학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이 명제의 당위성은 충분하나, 현재의 정치경제 생산체제에서는 공허하다. 보다 중요한 것은 방법의 문제다.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일 수 있는 방송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임금 노동자들이 온전히 누릴 수 있는 노동의 자유를 쟁취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노동력을 착취당하지 않는 근본적인 사회시스템의 변화가 필요한 것이다.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서는 사장 선임의 구조를 바꿔야만 한다. KBS의 경우 이사회에서 사장 후보자를 선정한 뒤 대통령의 임명을 받는다. KBS 이사회는 11명으로 구성되는데, 여당 추천 7명, 야당 추천 4명으로 구성된다. 사장 선임에 있어서 정부여당의 입김이 작용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MBC도 다르지는 않다. MBC는 경영관리기구인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 이사회에서 사장을 선임하는데, 이사 구성은 9명으로, 여당 추천 6명, 야당 추천 3명이다. 또한 KBS와 방문진 이사들은 방송통신위원회에서 선임하는데, 방송통신위원회의 위원 구성은 여당 추천 3명, 야당 추천 2명이다. 이 모든 임명권은 대통령에게 주어진다. 공영방송이 정권의 영향력 아래 놓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언론사 파업은 긴 시간을 보낸 후 다소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절대 뜻을 굽히지 않는 낙하산 사장들의 퇴진이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따라서 파업을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파업의 방향을 달리 설정할 필요가 있다. ‘공영방송의 지배구조 개선’, 즉 사장을 선임하는 구조가 당리당략에 좌우되지 않도록 개혁할 필요가 있다. 오랜 세월의 독재 정치를 청산하고 1987년 민주화투쟁을 통해 이뤄낸 가치가 ‘대의제’라면, 방송의 민주화 나아가 언론의 민주화를 위해서는 인(人)과 민(民)을 대의할 수 있는 언론 구조가 절실하다. 언론이 사회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기능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는 ‘언론 민주화’가 필요하다.

‘출발점’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직능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언론 노동자는 일종의 사회적 명성(prestige)을 가질 수 있다. 주요 언론사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들은 대중들의 선망 대상이 되기도 한다. 공공 재산인 전파를 사용하는 방송사에 등장하는 언론인들은 시청자들의 관심을 통해 유명세를 얻는다. 언론사라는 조직이 권력화되면서 언론 노동자들 사이에도 위계가 생겼다. 위계적으로 권력화된 조직은 통제가 용이하다. 또한 이 통제는 정권에 의한 언론 통제로 이어진다. 이에 따라 언론 민주화는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에서 더 나아가, 언론사 구성원들 간의 수평적 관계 구축으로까지 진전되어야 한다. 또한 언론인들이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그들에게 부여되는 명성을 사회적 책임감 환원해 시청자들에게 돌려줘야 한다.

노동자들의 파업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드러내는 균열이다. 언론 노동자들의 파업은 정파적 방송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투쟁이 되어야 한다. 이들의 파업에 대중들이 보내는 지지는 언론 자유와 공정보도라는 가치를 지켜달라는 당부와도 같다. 이제 “우리는 그들의 파업을 원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을 다시 배치하고자 한다. 지배적인 미디어 재현이 아닌 위치, 즉 언론 민주화와 언론 자유가 구현된 곳에서, 이 문장은 의미를 달리 갖는다. 공정보도와 인민을 대의하는 언론사로서 정체성 확립, 이는 목적지가 아닌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언론노조의 파업을 원하지 않는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6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