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즘은 합리적 분석 대상이 되기 어려운 현상이다. 문화․경제적으로 가장 선진적인 유럽 국가들 가운데 하나가 묵시적인 어조로 세계적 강국이나 파괴에 대하여 말하는 지도자 밑에서, 그리고 너무도 역겨운 인종증오 이데올로기 위에 세워진 체제에서 전쟁을 계획했고, 약 5천만 명을 죽인 세계적 대화재를 일으켰으며, 상상을 불허하는 성격과 규모의 잔학행위 ―수백만 명의 유태인들을 기계적 방식으로 대량 학살한 것에서 정점에 달한― 를 저질렀다. 아우슈비츠를 앞에 두고는 역사가의 설명력이 사실상 보잘 것 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 같다.” ―어안 커쇼.
1. 독일 노동자계급의 반파시즘 투쟁
독일의 나치즘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함에 따른 막대한 부담과 경제 대공황이 초래한 경제적 폐해, 그리고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 불안정 등을 역사적 배경으로 하여 생성되었습니다. 더 거슬러 올라간다면 프로이센 군국주의 전통과 나폴레옹 독일 점령 이후 본격적으로 형성된 민족주의, 나치즘 대두를 용이하게 한 바이마르 헌법체제(의회 의원 선거에서 비례대표제와 명부식 투표방법 도입, 국민창안과 국민투표제, 그리고 비상대권 채택 등), 그리고 베르사유 체제 등이 독일 파시즘 생성의 역사적 배경으로 지적되기도 하지요(강기용, 1995: 214).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함으로써 1919년 6월28일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알자스―로렌이 프랑스에 반환되었고, 서프로이센과 슐레지엔, 그리고 포젠이 재건된 폴란드에 할양되었으며, 단치히는 국제연맹이 감시하는 자유도시로 남았습니다. 또 ‘폴란드 회랑(Polish Corridor)’이 만들어져 동프로이센이 독일에서 지리적으로 분리되었습니다. 그리고 독일은 식민지를 상실하게 되었고, 오스트리아와 통일을 추진하는 일이 불가능해졌습니다. 독일군의 규모는 10만 명으로 제한되었고, 라인 강의 왼쪽 기슭은 협상국 군대의 감시 속에 무장이 금지되었으며, 협상국 군대의 점령 상태는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야만 종결될 수 있었습니다(풀브록, 2000: 239).
베르사유 조약 체결 당시 모습
1921년 1월에는 파리 회의에서 전쟁 책임에 대한 배상금의 규모가 정해졌는데, 그 당시까지 지불한 200억 마르크 외에 추가적으로 2,260억 금 마르크를 42년 동안 지불하기로 되었습니다. 배상금 문제는 도스안(Dawes Plan)으로 잠정적인 해결을 볼 수 있었습니다. 도스안은 독일의 이해관계와 미국의 경제적 팽창주의를 결합시킨 것이었죠. 1929년 6월에는 제1차 세계대전 연합국 측에 배상금 지불을 약속하는 ―배상금 액수가 낮게 조정되기는 했지만― 국제협정 ‘영 안(Yong Plan)’이 채택되었습니다. 그 뒤 1932년 미국의 후버 대통령이 배상금과 외채의 지불을 유예했고, 결국 1932년에는 배상금 지불이 최종적으로 중지되었지요.
베르사유 조약 체결과 배상금 지불을 둘러싸고 반공화주의․반민주주의 세력들은 그것을 정치적인 쟁점으로 삼아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적 책임으로 돌렸습니다. 그것은 바이마르 공화체제에 대한 강한 불신을 불러일으켰죠.
한편, 패전에 따른 영토 상실은 대규모의 실향민 유입을 가져왔고, 전쟁 종료에 따라 1,000만 명에 가까운 군인들이 사회로 복귀함으로써 사회의 불안 요소가 더욱 커졌습니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직업의 전문성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에, 사회에서 소외된 채 두터운 불만 층을 형성하였죠(김수용 외: 2001: 21).
이러한 가운데 1929~1933년의 세계경제 공황이 발생하여 심각한 사회․경제적 그리고 정치적인 충격을 던졌어요. 전쟁 패배에 따른 불안정 요소가 미처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생한 대공황은 독일 경제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죠. 단기 외채에 크게 의존하고 있던 상황에서 외채가 급속하게 빠져나갔습니다. 그리고 대량실업 사태가 극심한 사회불안을 불러일으켰죠. 1929년 9월에 130만 명에 이르렀던 실업자가 그 이듬해인 1930년 9월에는 300만 명 이상으로 증가하였고, 1933년 초에는 다시 600만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더욱이 공식 통계에 누락된 수치가 있었고, 또 당시 상당히 많은 노동인구가 정규 노동시간에도 못 미치는 시간 동안 일하고 있었음을 고려한다면, 독일의 노동인력의 절반가량이 실업상태에 있었다고 볼 수 있죠. 게다가 실업자 가운데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20%에 지나지 않았습니다(플브룩, 2000: 254).
경제공황에 따른 노동자계급의 곤란과 궁핍, 탄압을 공공연하게 주장하는 부르주아지의 이기적 요구, 그리고 나치 세력의 테러는 계급 사이의 대립을 격화시켰고,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부추겼습니다. 자본 측의 공세에 대한 노동자 저항은 점점 강화되었고, 투쟁에서 보인 그들의 태도는 갈수록 완강해지면서, 부르주아지는 심각한 불안을 느꼈죠. 이러한 상황에서 독점 부르주아지 사이에는 ‘강력한 권력’의 수립과 의회제 민주주의의 폐지에 대한 요구가 차츰 커졌지요(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5 Volume 5: 307).
심각한 경제위기는 드디어 1930년 3월27일 뮐러(Müller Herman) 총리가 이끄는 내각을 물러나게 하였습니다. 개혁적 사회주의자였던 뮐러는 1928년 6월 이후 사회주의 정당을 비롯하여 가톨릭계의 중앙당(Zentrumspartei: 젠트룸), 온건 중도 성향의 사회민주당, 그리고 보수적인 국제주의 정당인 인민당까지 5개 정당이 연합한 연립정부를 이끌었습니다. 연립 정권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어떠한 정부보다도 오랜 기간인 21개월 동안(1928년 6월~1930년 3월) 집권하였죠.
그러나 이러한 집권은 강력한 힘의 상징이라기보다는 대안 부재를 나타내는 형상에 지나지 않았어요. 연립 정부가 처음 구성되어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시기인 1928년 6월에도 정계는 정파들 사이의 심각한 정책 불일치 때문에 혼란에 빠져 있었죠. 이러한 이유로 2년 뒤 대공황으로 수백만 명이 일자리를 잃게 되는 사태가 발생했음에도, 정치권에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가 없었습니다. 좌파는 세금을 높여서 실업수당을 늘리려 했고, 온건파와 보수파는 사회비용을 줄여 세금을 낮추려 했습니다. 사회보험이냐 세금부담이냐를 놓고 암초에 부딪친 연립 정부는 침몰하기 시작했죠.
1930년 3월 이후 독일 의회에서는 과반수 정치세력 구성이 불가능한 상태였어요. 그래서 가톨릭 노동조합 간부였던 브뤼닝(Brüning Heinrich von )이 과반수의 지지를 받지 못한 채,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헌법 제48조에 따라 위임받은 비상대권에 좇아 총리가 되었습니다. 브뤼닝 내각이 들어서자 의회의 회기와 입법이 줄어든 반면, 헌법 제48조에 따라 대통령의 긴급명령권을 이용하는 빈도가 늘어났습니다. 이렇게 하여 브뤼닝 정부는 부르주아 의회 제도를 계통에 따라 깨뜨려나가는 길을 걸었죠.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기 전까지 독일인들은 거의 3년 동안 의회에서 과반수를 구성하지 못한 비상 정부의 통치를 받아야만 했습니다(Paxton 2005: 92).
파울 폰 힌덴부르크(1847~1934)
나치당은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전반기에 걸쳐 급속한 성장을 이룩하였습니다. 뮐러 정권이 물러나면서 독일 정치체제가 교착 상태에 빠졌던 1930년 3월27일 당시에는 나치당은 아직 소수 정당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1924년 말에 출옥한 히틀러는 1925년에 나치당을 재건했고, 나치당은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기의 지지 기반이었던 바이에른의 좁은 범위에서 벗어나 독일 전역으로 조직 영역을 확대해나가면서 다양한 사회집단으로부터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죠. 나치당의 지지기반은 여전히 하위 중간계층과 개신교도, 교육받은 상위 중간계층, 전문직 종사자,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일부였습니다. 나치당은 1928년 5월 선거에서 2.5%의 득표율을 기록하고 겨우 12개의 의석을 확보했을 정도였습니다(플브룩, 2000: 255~257).
1929년 나치당은 우익 언론 재벌 후겐베르크(Alfled Hugenberg)가 이끄는 민족국민당과 연대해 ‘영 안’ 반대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그 투쟁은 나치당에게 엄청나게 큰 광고 효과를 가져다주었죠. 또 전통적인 우익집단과 연대했다는 사실 자체가 나치당이 신뢰할 만한 정치운동 조직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나치당의 약진은 1930년 9월 선거를 통해 이루어졌어요. 그 선거에서 나치당은 640만 표(18.3%)의 지지와 107개 의석을 확보함으로써 의회에서 사회민주당에 이어 제2정당으로 부상했죠. 이 선거에서는 ‘중도 부르주아 정당들’이 몰락하고 나치당과 공산당이 높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공산당은 선거에서 약 460만 표를 얻어 77석을 확보하였죠(1928년 5월 선거에서는 54석을 획득했다). 사회민주당은 143석을 확보했으나 이전에 비해 10석을 잃게 되어, 다음 선거에서는 지금보다 훨씬 불리한 결과가 발생할 것을 우려하여 브뤼닝 내각을 ‘묵인’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독일 나치즘이 이처럼 급격한 세력 확장을 할 수 있었던 일차적 배경은 세계를 휩쓴 경제위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경제공황으로 절망 상태에 놓인 프티 부르주아 층, 퇴역 군인, 계급 탈락분자 등을 자기 진영으로 끌어들인 나치당은 긴장을 격화시켜 국민들 사이에 불안과 공포감을 조성함으로써 지지 세력을 확보할 수 있었죠.
그러나 경제위기가 유일한 배경은 아니었어요. ‘민족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을 앞세운 파시스트는 사회적 민중선동 방책을 널리 행사하여 광포한 배타적 애국주의․반공주의 선동을 펼쳤습니다. 그들은 노동자들에게 실업의 일소와 공정한 임금을 약속했고, 농민들에게는 채무의 경감과 토지경매의 중지, 소상인과 수공업자에게는 백화점의 폐쇄와 ‘이자 노예제’의 제거 등을 약속했습니다. 또 나치당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상처를 입은 독일인들의 민족감정을 이용하였고, ‘공정’과 독일의 군사적 ‘권위’의 부활을 호소했으며, 인종주의와 반유태주의를 주창하였죠.
나치당의 이와 같은 정책과 정치 활동에 대해 거대 금융자본가와 산업자본가들은 그것을 지지했으며, 제국주의자들은 파시즘에서 예방적 반혁명의 수단을 추구함으로써 나치당에 대한 지원 방책을 모색하였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5 Volume 5: 308).
한편, 나치즘의 급격한 부상은 나치즘에 반대하는 정치 세력의 결집과 대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데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도 일정한 설득력을 갖습니다. 당시 독일에서 나치당에 대항할 수 있는 정치세력은 독일 공산당과 사회민주당뿐이었죠. 그러나 이들은 이탈리아 진보정당들이 파시즘의 대두와 부상을 막는 데 실패한 경험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어요. 다시 말해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이라는 두 진보 정당은 그들 사이의 해묵은 이데올로기 갈등을 극복하지 못한 채, 나치즘에 대한 공동전선 형성과 효과적인 투쟁을 전개하지 못하였지요(김수용, 2001: 28).
하인리히 브뤼닝(1885~1970)
그렇다고 독일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이 속수무책으로 ‘치명적 수동성’만을 보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독일 공산당은 나치즘의 위협이 커지는 조건에서 광범한 반제전선과 반파시즘전선의 결성 방침을 전면에 제기하였죠. 이미 1929년 10월 독일공산당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텔만은 대자본가가 나치당의 재건을 돕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나치당을 ‘금융자본의 가장 위험하고 더러운 도구’라고 규정했습니다. 독일 공산당은 파시스트의 민족주의․보복주의적 강령을 반대하고, 1930년 8월에는 ‘독일 인민의 민족․사회적 해방을 위한 강령’을 채택하였습니다. 이 강령은 ‘독일 사회주의’라는 나치당의 민중선동 실체를 폭로하고, 모든 민주주의 세력이 반파시즘의 행동 기반 위에서 단결하여 독점자본의 권력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주장하였죠. 강령은 또 나치당을 극단적인 반동과 전쟁 정당으로 규정하고 금융자본의 가장 반동적인 층이 이 당을 지지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반파시즘 통일전선을 위한 투쟁은 매우 복잡한 양상을 나타냈으며, 큰 어려움에 부딪쳤습니다. 그 이유는 우선 공산당 내부에서 사회민주당을 파시즘의 한 분파라는 견해를 고수하는 노이만(Neuman, Heinz)과 좌익 분파주의 그룹이 존재하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의 옹호에 집착하면서 반파시즘 통일행동을 거부하는 사회민주당의 정치노선이 변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반파시즘 통일전선 형성은 사실상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시 많은 공산주의자들은 사회혁명이 멀지 않았다고 믿고 있었는데, 그것도 반파시즘 통일전선 형성을 가로 막은 주요한 요인이 되었죠.
사회민주당은 그들 자신의 ‘민주주의 원칙’을 고수하면서 나치당이나 공산당 모두를 사회민주당이 주축이 되어 이룩한 독일 최초의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반민주적 세력으로 규정했으며, 그래서 나치당과 공산당은 다 같이 사회민주당의 투쟁 대상이 되었습니다. 사회민주당은 그들의 민주주의 강령을 내세워 대중들을 설득하면 국민적 지지를 확보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죠(김수용 외, 2001: 28~29).
이러한 가운데서도 독일 공산당이 주도하여 1930년 가을에 ‘반파시즘 투쟁동맹’이 결성되었어요. 1931년 전반에는 동맹원 수가 10만 여명에 이르렀죠. 1932년 1월에는 공산당의 지도로 제1회 전 독일 농민대회가 베를린에서 열렸고, 농민위원회 결성이 논의되었습니다. 한편, 1932년 봄 독일 공산당은 사회민주당에 대해 대통령 선거에서 통일후보를 내세우자고 제안하면서, 프로이센의 사회민주당 지도자 오토 브라운을 지지할 용의가 있다고 표명하였습니다. 그러나 독일 사회민주당은 공산당의 제안을 거부하면서 대통령 선거에 후보자를 내지 않는다고 밝혔죠. 독일 공산당은 텔만을 대통령 후보로 선정하였습니다. 선거 결과는 [표2]에서 보는 바와 같습니다.
힌덴부르크는 1차 투표에서 유효 투표의 49.6%를 획득했으나 과반수 미달로 당선되지 못하였으며, 2차 투표에서 53%를 획득하여 당선되었습니다. 히틀러는 1차와 2차 투표에서 각각 30.1%, 36.8%를 획득하였죠.
대통령 선거에서 독일 공산당은 “힌덴부르크를 지지하는 사람은 히틀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는 논지로 “힌덴부르크나 히틀러를 지지하는 사람은 독일 부르주아의 전쟁 정책을 지지 하는 사람과 같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선거전에 임했습니다. 이에 반해 사회민주당은 “텔만을 지지하는 사람은 히틀러가 승리하는 것을 돕는다.”는 논리로 힌덴부르크를 지지하였죠(홍성곤, 1998: 130).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 1932년 5월26일 독일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반파시즘 행동(Antifaschistische Aktion)’에 관한 호소문을 발표했는데, 여기서 공산당은 노동자계급에 대해 “독일에서 공공연한 파시스트 독재를 수립하고자 원하는 히틀러 파시스트의 피어린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호소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호소문은 대중의 자위 대책,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한 반파쇼 세력의 통일전선 결성을 제안하였죠.
독일 공산당은 ‘반파시스트 행동’이 가지는 전술적 측면을 다음과 같이 집약했어요. “우리는 처음부터 가장 높은 요구를 제기해서는 안 된다. 노동자들이 기꺼이 투쟁에 참여할 수 있는 요구를 제시해야 한다. 더구나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 맞게 그것을 제시해야 한다.” 따라서 “통일전선 정책을 결정적으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 상투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통일전선 정책을!”(홍선곤, 1998: 137).
독일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텔만은 “히틀러 파시즘이 정권에 참가하는 길을 가로막기 위해서는 파시즘에 반대하는 혁명적 대중투쟁의 프롤레타리아 통일전선 수립이 절박하게 요구되고 있다. 지금 문제되는 것은 중앙위원회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방책과 함께 독일에서 새롭고 더욱 대규모적이고 특별한 행동 방식으로 우리가 활동하는 데 성공할 수 있는가, 어떤가에 있다.”고 강조하였죠(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5 Volume 5: 311).
독일 공산당은 ‘반파시즘 행동’ 결정을 계기로, ‘파시즘이냐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냐’는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한 ‘계급 대 계급’ 전략노선을 ‘수정’하였습니다. 파시스트 세력이 강화되어가는 상황에서 독일 공산당은 ‘파시스트 독재냐 파시스트 위협의 격퇴냐’라는 문제를 당의 직접적인 과제로 설정하였죠.
독일 공산당의 반파시즘 전략 수정이 뚜렷하게 부각되지 못한 데는 국제적 요인도 함께 작용하였어요. 즉, 독자적으로 반파시즘 전략의 수정을 추진한 독일 공산당 지도부도 현실적으로는 코민테른과 스탈린의 견해를 고려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현실 정치’ 요인 때문에 독일 공산당의 전략적 주도권이 분명하게 부각되지는 못하였죠(홍성곤, 1998: 157).
연설하는 에른스트 텔만(1886~1944)
이러한 가운데서도 ‘반파시즘 행동’은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공산당 지도부의 헌신적인 노력이 행해졌어요. 독일 공산당의 이러한 노력과 더불어 공산당의 제안을 거부한 사회민주당 계열의 노동자 동조도 점점 커졌죠. 1932년 6월 말에는 독일 노동조합총동맹은 반나치즘 통일전선을 지지한다는 의사를 표명하였습니다. 그러나 1920년 ‘카프 반란’을 총파업으로 저지한 것과 같은 대규모적인 투쟁이나 ‘혁명적 대중투쟁’은 결코 수행되지 않았죠.
공산당과 사회민주당 양당은 다 같이 나치당이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고 예상하였습니다. 쿠데타에 대항하는 데는 불법성의 부담을 지지 않고도 파업을 일으킬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판단하였죠. 그러한 판단 때문에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은 히틀러에 대항할 적절한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어요(Paxton, 2005: 93). 1932년과 1933년의 독일 정치정세는 음모와 오산(誤算)으로 뒤덮인 복잡한 과정이 전개되었습니다. 브뤼닝 내각은 힌덴부르크가 1932년 4월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치욕을 겪은 일 때문에 퇴진하였습니다. 그 해 여름부터 겨울까지 진행된 음모의 주역은 슐라이허 장군이었습니다. 슐라이허는 브뤼닝 내각을 퇴진시키고 파펜 내각을 출범시켰죠.
파펜은 입각하자마자 브뤼닝 정부가 나치의 준군사 조직인 돌격대(Sturm-abteilung)와 친위대(Schutzstaffel)에 내린 금지조치(돌격대 제복 착용 금지를 비롯한 여러 조치)들을 1932년 6월 해제했어요. 이에 따라 나치의 폭력 사태가 자행되었는데, 몇 주 동안에 103명이 살해되고 수백 명이 다쳤죠(Paxton, 2005: 95). 파펜은 또 기존의 프로이센 주 정부를 강제로 퇴진시키고 연방 정부가 임명한 주지사로 하여금 주 정부를 구성하도록 했습니다.
1932년 7월31일 독일 의회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이 선거에서 나치스는 ‘현기증 나는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나치스는 이 선거에서 230석을 획득하여 제1당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공산당은 89석을 획득하였습니다(플브룩, 2000: 258).
이러한 선거 결과에 비추어 본다면, 보수 세력에게는 히틀러는 하늘이 내려준 존재와도 같았습니다. 1932년 7월 이후에는 독일 최대 정당인 나치당의 당수인 그가 좌파 세력을 배제한 채 과반수를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처음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죠.
슐라이허는 선거 이후의 정부 구성을 둘러싼 정치적 구상에서 나치의 입각을 놓고 히틀러와 협상을 벌였으나 결코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히틀러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마지못해 제시한 부총리직을 거부하였죠.
독일공산당의 반파시즘 행동 포스터
1932년 가을의 독일 정치 정세는 매우 불안정한 양상을 드러냈어요. 파펜 정부에 대한 의회의 불심임이 제기되었는가 하면, 우익 보수진영과 부르주아지, 군대, 그리고 힌덴부르크까지 의회주의 정부를 제거하고 구 엘리트를 권좌에 앉히려 했으며, 의회 선거의 헌법적 근거를 없애려는 전략에 부심하였죠.
이러한 가운데 1932년 9월 5일부터 12월까지 약 1,100건의 파업이 발생하였습니다. 대부분의 파업은 성공적으로 끝났죠. 파업은 주로 중소기업들, 특히 금속산업, 섬유산업, 건설업을 중심으로 발생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발생한 파업의 두드러진 특징은 노동자계급이 처음으로 정부의 긴급명령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하여, 그것의 시행을 상당한 정도로 막아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파업의 물결은 실업운동이 퇴조하기 시작할 무렵에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파업투쟁과 실업자운동이 노동자계급의 강력한 투쟁으로 결합되지는 못하였죠. 더욱이 공산당은 스스로 정치투쟁에 나선 노동자대중을 조직하고 그들을 확고하게 지도할 만큼 강력하지 못했습니다.
가을에 시작된 파업 투쟁은 11월3일에서 7일까지 계속된 베를린 운수 노동자의 파업에서 절정에 이르렀어요. 노동자 22만 명이 참가한 이 파업은 겉으로 보기에는 공산당과 나치당이 파업을 찬성한 반면, 사회민주당과 독일 노동조합총동맹 지도부는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나치당과 공산당 사이의 통일전선’의 전형적인 사례로 단정하는 견해는 사실을 정확하게 보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죠. 당시 『전진』의 수석 편집자 프리드리히 슈탐퍼(Friedrich Stampfer)가 유포한 이러한 견해를 히틀러는 다음과 같이 부정하였습니다. “내가 파업 참가를 금지시켰다면, 사람들은 분노했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우리의 노동자 추종자를 잃어버렸을 것이다. 그것이 독일에 이로운 것이었을까?” 아무튼 노동자들이 벌인 강력한 파업 투쟁은 선거에 큰 영향을 끼쳤죠.
이와 같은 정세에서 1932년 11월 6일 의회 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선거에서 나치당의 득표는 7월 선거에서보다 200만 표 정도 감소했고, 의석도 196석으로 줄어들었죠. 그러나 나치당은 여전히 원내 최대 정당이었어요. 나치당의 지지율 감소는 공산당의 득세로 나타났는데, 공산당은 이 선거에서 7월 선거에서보다 70만 표 정도 증가한 540만 표를 획득했으며, 의석은 100개를 차지하였습니다. 사회민주당은 약 725만 표를 획득하여 121석을 차지하였고, 제2당의 위치를 고수했죠.
힌덴부르크는 선거 이후 곧 슐라이허를 새 총리로 임명하였습니다. 슐라이허는 짧은 재임 기간(1932년 11월~1933년 1월) 동안 적극적인 고용 창출 계획을 준비하고 여러 계열의 노동조합과도 관계 개선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는 의회에서 나치당의 중립성을 확보하려는 의도로 나치당의 우두머리이자, 당내 반자본주의 세력의 지도자였던 슈트라서(Gregor Strasser)까지 끌어들이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히틀러는 결코 슈트라서의 ‘배신’을 결코 잊지도, 용서하지도 않았죠. 슐라이허의 이러한 정책 구상은 가뜩이나 고용창출 정책과 조세정책 때문에 큰 불만을 갖고 있던 기업가들과 대지주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켰습니다(플브룩, 2000: 259).
1933년 1월 독점자본의 보수적 그룹과 주요 부르주아 정치조직 지도자들은 힌덴부르크에게 히틀러를 새로운 연립내각의 총리로 임명하라는 거센 압력을 행사하였어요. 이러한 압력이 행해지는 가운데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파펜의 설득으로 1933년 1월28일 슐라이허를 해임하고, 1월 30일 드디어 히틀러를 총리로 지명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