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유니손 대의원대회 탐방기

노동사회

영국 유니손 대의원대회 탐방기

구도희 0 4,972 2013.09.04 03:43
세계 노동조합운동의 시발점이었던 영국의 가장 큰 노조인 유니손(UNISON) 전국대의원대회(National Delegate Conference)를 다녀왔다. 꼭 가야할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 같은 연구자가 보통 외국 노조를 방문하는 일은 공식적으로 초대를 받거나, 특별한 과제가 있어서 직접 인터뷰가 필요할 때일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냥’ 다녀왔다. 
130만 명의 노동자를 조직하고 있는 유니손은 지자체 공무원을 비롯해 학교, 의료부문, 교통, 전기, 가스 등 영국 공공부문 노동자를 폭넓게 포괄하고 있다. 유럽의 많은 노조들이 2~4년에 한 번씩 전국 대의원대회를 여는 것과 달리 유니손은 일 년에 한 번씩 거의 일주일에 걸쳐 회의를 개최하고 있다. 
 
<유니손 대의원 대회장 전경 ⓒ 진숙경>
 
한 달 전에 배포되는 자료집과 출입증
2013년 6월18일(화)부터 21일(금)까지 개최된 대의원대회장은 세계적인 록밴드 비틀즈의 도시로 유명한 리버풀의 ACC(Arena and Convention Centre)로, 4~5천여 명의 인원을 수용하기에 넉넉한 곳이었다. 대회가 시작되기 1시간여 전부터 대회장을 찾는 대의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대회장 앞에서는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보듯이 특정 안건에 대해 지지를 호소하는 유인물이 배포됐고, 특정 정파의 신문을 판매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런데 대회장 입구에 들어서려는 순간, 우리나라 대의원대회와는 다른 풍경을 접할 수 있었다. 양복을 빼입고 행사장 출입증을 확인하는 덩치 큰 행사요원(노조 실무자는 아니고 ACC측 경비 요원이거나 전문업체 사람으로 파악됨.)의 존재는 이국 노조의 대의원대회에 들어가고 있음을 실감케 했다. 
대의원들이 사전에 등록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참관을 원하는 사람도 2~3개월 전에 요청을 해서 허락을 받아야 한다. 대의원이든, 참관인이든 대의원대회 참석이 확인된 사람들에게는 한 달여 전에 대의원대회 자료와 출입증이 우편으로 배포된다. 출입증은 대의원, 참관자(은퇴한 조합원과 방문자 등)로 구분된다. 한마디로 ‘준비된 자’만 대의원대회 참석이 가능하다. 물론 좌석도 구분되어 있다.
 
시간과 절차 엄수하는 노조 대의원대회
유니손(UNISON) 대의원대회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정해진 시간에 시작하고 정해진 시간에 끝난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라고 느껴질 만큼 1~2분 정도의 오차만 존재할 뿐 정해진 시간을 지키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큰 쟁점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잘 알다시피 영국은 잉글랜드를 비롯해 웨일즈,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등 각각 서로 다른 문화와 역사를 가진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어, 노조 활동 방식이나 성향에 있어서도 차이가 존재한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처럼 입장을 달리하는 정파조직들도 존재하고, 회의 중 이들의 입장이 나뉘어 논쟁이 붙기도 한다. 하지만 회의가 지연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서로가 합의된 회의 진행의 규칙을 잘 지키기 때문이다. 110여 페이지에 달하는 대의원대회 자료 뒤에는 회의 진행 절차에 대한 가이드가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각 기구들의 역할이 무엇인지, 의장을 비롯해 위원장 등 개인들이 회의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지, 또 투표 및 수정안이 제기돼 논쟁이 형성될 경우 찬반 발언 순서를 어떻게 정할지, 대의원 개인이 발언을 하고 싶을 때는 어떤 과정을 거쳐 신청을 해야 하는지 등 회의 절차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발언기회 조율하는 의사발언 조정 담당자
거대한 무대 정면에는 의장을 비롯한 노조 간부들이 앉고, 의장 오른쪽 자리에는 서기들, 왼쪽으로는 ‘의사발언 조정 담당자(rostrum control staff)’ 3명이 앉아 있다. 우리와 매우 다른 시스템이 의사발언 조정 담당자들의 존재이다. 대의원들이 안건에 대해 발언하고 싶을 때 바로 손을 들어 의장으로부터 발언권을 얻지 않는다. 규정상 발언하고 싶을 때는 자신이 속한 지역 대표자(regional representatives)에게 얘기하고, 대표자는 회의장 앞에 있는 의사발언 조정 담당자에게 얘기해 발언권을 얻게 된다. 발언 순서는 이들 담당자들에 의해 조정 및 결정되는데, 발의 안건에 대해 설명 이후 반대가 있을 경우, 반대 의견을 먼저 얘기하고 다음으로 찬성 발언을 한다. 이렇게 정해진 순서에 따라 발언 신청자들은 맨 앞자리에 마련된 발언 대기석에 앉아 대기해야 한다. 의장석을 기준으로 왼쪽 자리는 찬성 발언자, 오른쪽 자리는 반대 발언자들이 앉게 된다. 
발언자는 10분 이내에 발언을 마쳐야 하는데, 회의장 양 옆에 3색 신호등이 준비되어 있어서 발언을 시작한지 5분이 지나면 노란색 신호등이 켜지고, 10분이 되면 빨간불이 켜지며, 빨간불이 켜지는 즉시 발언자는 발언을 중단해야 한다. 10분 안에 준비한 발언을 다 하지 못한 사람이 매우 많았으나, 의장이 시간이 다 되었음을 지적했을 때 이를 어기고 계속 발언하는 대의원은 한 명도 없었다. 
 
113개 안건을 효과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제도들
대의원대회가 사전에 매우 잘 준비되고 있다는 것은 113개에 달하는 안건을 주제별로 정리해 한 달여 전에 안건 자료를 배포한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안건은 중앙 집행 단위인 NEC(National Executive Council, 우리나라 노조의 상임집행위원회와 비슷함)에서 제기하는 것이 많고, 이밖에 각 지역 단위 및 전국청년조합원포럼(National Young Members' Forum), 전국여성위원회(National Women's Committee) 등과 같은 노조 내 특정 그룹에서 제출한다. 주로 중앙에서 제출된 안건에 대해 지역이나 다양한 그룹들이 수정안을 제출하면, 이에 대해 NEC는 지지하는지 반대하는지 입장을 정하고, 이를 자료에 제시한다. 자료만 잘 살펴봐도 무엇이 쟁점이 되는지 확연히 알 수 있다. 
그런데 안건 처리와 관련해 우리나라 대의원대회와는 달리 자료로 대체되거나 찬반토론 없이 안건을 통과시키는 경우는 없었다. 상당수 많은 안건들은 찬반양론보다는 찬성만 존재하는 경우가 많았음에도, 10여 명의 발언 신청자들의 의견을 듣는데 상당 시간을 투자했다. 처음에는 다 찬성하는데 왜 그렇게 많은 의견을 듣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사전에 준비된 지지 이유를 청취하는 것은 안건 통과만이 목적이 아니라, 각 안건들이 가지는 사업이나 투쟁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게 됐다. 
발언자들은 대부분 준비된 발표문을 읽었다. 10분이라는 한정된 시간에 다 발표해야 하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읽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사례를 얘기하거나 정부를 강도 높게 비판하는 등 다양한 이유들로 안건 지지나 반대를 호소한다. 4일간의 회의 기간 중 한 명이 다른 안건에 대해 발언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는 하지만, 각 지역 대표자들이 발언자의 신청을 받다보니 지역 내 대의원들에게 발언 기회가 최대한 골고루 제공되는 것으로 보인다. 훌륭한 발언을 해 큰 박수를 받는 대의원은 전체 대의원들 머릿속에 각인되고, 소위 전국적 인물로 성장하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대의원대회에서 처음으로 발언하는 대의원은 “대의원대회에서 처음으로 발언하는 겁니다”라고 밝히고, 전체 대의원들은 박수로서 환영한다. 첫 발언에 대한 격려이자, 앞으로의 더 활발한 활동을 촉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113개에 달하는 안건에 대해 하나하나 토론을 들어가며 대회 기간 중 모두 처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회 순서에 포함되지 못해 대의원대회의 결의를 거치지 못한 안건은 처리되지 못한 채 남아 있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안건 처리 순서가 매우 중요하다. 유니손 차기 사업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가 어찌 보면 안건 순서에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어떤 안건을 본회의에서 논의할 것인가를 논의하기 위해 SOC(Standing Order Committee)라는 별도의 기구를 두고 있다. SOC에는 중앙 간부 4명과 13개 지역대표자가 참여해 논의한다. 
 
찬반이 맞서는 안건은 카드 투표(Card Vote)로
조직화에 대한 사업과 대정부 투쟁을 결의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안건은 이견 없이 압도적 다수의 찬성으로 통과된다. 이때마다 의장은 “분명한(clear) 의사를 표해주셔서 고맙다”고 말하고 안건을 통과시킨다. 
그렇다면 찬반 의견이 어느 쪽이 많은지 분명하지 않을 경우는 어떻게 하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찬반 대의원 수를 세어서 결정하는데, 영국 유니손은 ‘카드 투표(Card Vote)’라는 독특한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카드 투표는 조합원 총원을 기반으로 투표하는 방식이다. 의장이 찬반 양론을 지지하는 대의원수가 비슷하다고 판단하면, 카드 투표에 돌입하겠다고 선언할 수 있다. 이 경우에는 사전에 각 지부에 하나씩 지급된 카드(사진 참조)에 지부장이 전체 조합원 중 몇 명이 찬성하고, 몇 명이 반대하는지를 적어서 낸다. 집행부는 이렇게 제출된 카드의 찬성, 반대 숫자를 집계하여 안건의 통과 여부를 결정한다. 예를 들어 맨체스터 지부의 조합원이 1,800명이고, 이 중 1천명은 찬성, 800명은 반대한다고 적어 넣으면, 각각 찬반 인원에 집계되는 것이다. 그 비율은 지부대표자들이 논의하여 정한다. 일상적인 조합원들의 성향과 의견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고려하여 카드에 적어 넣는다는 것이다. 카드 투표에 어떻게 투표했는지 보고되기 때문에 지부대표자들이 자의적으로만 결정할 수는 없다. 카드 투표는 대의원 수가 아닌 지부조합원 수를 근거로 투표하는 것으로, 조합원이 많은 지부에게 유리한 방식이어서 작은 지부에서는 선호하지 않는다. 이번 대회에서는 3번의 카드 투표가 시행되었다. 조합비 배분 문제 등 예민한 문제에 대해 주로 카드 투표가 많이 이루어지는 편이라고 노조 실무자는 전했다.
이런 제도로 인해 재적 인원 3천여 명이 넘는 대의원들 수를 현장에서 세는 일은 벌어지지 않으며, 출석 인원 부족으로 대회가 유회되는 경우도 볼 수 없다. 
 
한국 노동운동이 정책대의원대회를 실현하기 위하여
유니손 대의원대회를 보며 사전준비를 보다 철저히 하자는 등의 원론적 수준이 아니라, 우리나라 노조가 도입하면 매우 유용하고 비효율적인 진행을 변화시킬 것으로 기대되는 점 두 가지만 짚어보겠다. 
첫째, 회의 진행 절차에 대한 상세한 안내서를 제공하자는 것이다. 안건이나 수정안 제기는 어떻게 하며, 발언을 원할 때는 어떻게 하는지 등의 내용이 될 것이다. 모든 대의원들이 공동의 수칙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불필요한 회의 진행 절차에 대한 불만과 다툼을 상당히 줄여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의장을 도와 회의 발언 희망자들의 순서를 정하는 의사발언 조정 담당자 제도를 도입하면 매우 유용할 것이다. 이 제도를 통해 일부 몇몇 대의원들에게 발언이 집중되는 것을 방지하며 중복된 발언을 줄이고, 사전 준비된 발언자를 늘릴 수 있을 것이다. 많은 토론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회의 시간을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조직의 한 해 사업을 의결하는 중요한 대의원대회에 안건도 모르고 참석하는 대의원들을 방치하는 현재의 준비 수준으로는 한국 노동운동의 전망을 논하기조차 부끄러운 것 아닌가 한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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