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보기] 여성 노동자가 바라본 두 개의 미국: 러스트벨트의 밤과 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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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보기] 여성 노동자가 바라본 두 개의 미국: 러스트벨트의 밤과 낮

윤자호 0 1,907 2021.06.07 09:00

[지구촌 돋보기] 여성 노동자가 바라본 두 개의 미국: 러스트벨트의 밤과 낮​1)


작성자: 윤자호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


무언가를 소개하는 것은 늘 어렵습니다. 특히 잘 모르는 사람이나 대상을 소개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인데, 한정된 정보를 편협한 제 시각으로 본 후, 그것을 다시 굉장히 협소한 언어로 끄집어내기 때문입니다. 고민은 소개하고자 하는 대상이 멋질수록 깊어집니다. 『러스트벨트의 밤과 낮』을 읽고 나서 드는 생각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엘리트 콜레트 골드바흐는 소위 밀레니얼 세대 여성입니다. 공화당을 지지하는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다가 석사학위를 미처 받지 못한 채 파트타임 페인트공으로 수년 동안 일했습니다. 『러스트벨트의 밤과 낮』은 쥐가 끓는 싸구려 아파트, 학자금 대출 상환 등 산적한 금전적 어려움을 타계하기 위해 러스트벨트 철강 노동자로 약 3년 동안 일했던 저자의 경험을 담은 책입니다. 철강 노동자로 일하며 경제적인 안정을 찾고, 심신이 단단해진 골드바흐는 석사학위를 마쳤으며, 현재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정리하니 개인의 노력으로 시련을 극복하고 마침내 원하는 것을 얻어냈다는, 지극히 미국적인 성공신화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밀레니얼 세대 여성의 성공신화라고 압축하기에, 이 책에서 골드바흐가 보여주는 날카로운 통찰력과 ‘미국적인 것’에 대한 비판은 선연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들은 온갖 상투적인 말이 일시에 떠올랐다. 꿈꾸면 이룰 수 있어! 너는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특별한 꽃이야! 맞는 말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어쩌면 하나의 문화로서 우리는 이 빌어먹을 특별하다는 감정에 매료된 나머지, 나라를 온통 집어삼킨 개인주의의 유독성에 눈을 감았는지 모른다. (p. 399) 


골드바흐가 영문학을 전공한 것은 영문학이 어려웠기 때문인데, 어려운 일에 도전하는 것이야말로 미국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석사학위를 미처 받지 못한 것은 어떻게 보면 간단한 서류 처리를 마무리하지 못해서인데, 이는 골드바흐가 양극성 장애를 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골드바흐가 양극성 장애를 앓게 된 것은 (높은 확률로) 대학교에서 겪은 성폭력 경험 때문입니다. 


골드바흐는 어릴 때부터 굳건하게 믿어 마지않던 ‘미국적인 것’으로 인해 고통 받았습니다. 고통은 미국 사회의 양극화와 경제위기에서 비롯된 것(일자리와 거주의 불안정과 경제난) 때문이기도 하지만, 골드바흐가 여성이 아니었다면 받지 않았어도 될 고통 역시 큰 자리를 차지합니다. 어린 시절 골드바흐는 세상의 나쁜 것을 치우는 수녀가 되고 싶어 했고, 그 꿈의 흔적을 좇아 보수적인 가톨릭 계열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 대학에서 성폭력을 겪고 대학 내 강간문화를 인지한 골드바흐는 또 다른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자신의 경험을 학교 측에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여성인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는 평가와 “가해자도, 피해자도 잘못했다.”는 학교 측의 결정이었습니다. 


책은 골드바흐가 어릴 때 어렴풋하게 공포를 느꼈던 제철소에 취업해 산업안전교육을 듣는 시점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노동조합이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고임금-장시간노동 일자리이며, “집과 차를 사고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자리입니다. 하지만 운이 안 좋으면, 혹은 조심하지 않으면 다치거나 목숨을 잃는 일자리이기도 하고, 장시간 노동과 교대제 근무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과 지낼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는 일자리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제철소에는 여러 모습이 존재합니다. 죽은 동료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함으로써 추모하고, 동료의 가족을 위해 기꺼이 모금활동을 하며, 서로의 안전을 챙기고, 서로 유감이 있더라도 노동자끼리 해결하거나 노동조합에 중재를 요청하는, ‘서로 연대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여성의 통찰력은 평가 절하되고, 남성의 실수에는 관대하나 여성의 실수에는 그렇지 않은 성차별적 문화 역시 존재합니다. 저자는 아주 따뜻하고 애정 어린 눈으로 제철소와 제철소 노동자들의 면면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 따뜻함은 누군가와 치밀한 시간을 보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강인함에서 비롯되는 것 같습니다.  


골드바흐는 철강 노동자로서의 경험과 함께, 번영과 쇠락으로 요약할 수 있는 러스트벨트의 산업사를 조망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클리블랜드에서 태어나고 자란 자신의 경험을 반추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아무말’을 하는 것 같지만, 경험과 키워드를 매개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전환 시키는 통찰력과 유머 감각에 절로 미소가 지어집니다. 태어난 국가와 문화도, 모어(母語)도, 삶의 궤적도 다른 골드바흐에게 동지애를 느낄 수 있는 탁월하고 멋진 순간들이 도처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가장 멋진 부분을 꼽으라면 트럼프가 당선됐을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갑갑함을 느꼈던 저자가, 여성 동료들과 함께-조합원들과 함께- 거리로 시위를 나가는 부분을 말하고 싶습니다. 저자는 동료들과 함께 거리에서 목소리를 내며, 과거 자신이 겪은 일을 소화해냅니다. 이 이야기를 밀레니얼 세대의 성공신화라고 일축할 수 없는, 복잡한 경험과 통찰력, 그리고 힘이 느껴지는 부분입니다. 


1) 엘리스 콜레트 골드바흐 저, 오현아 역(2020), 『러스트벨트의 밤과 낮』,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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