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무능한 자본, 기업 틀에 갇힌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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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무능한 자본, 기업 틀에 갇힌 노동

노광표 0 3,642 2017.03.29 11:28
 
19대 대통령 선거일이 5월9일로 확정됨에 따라 후보들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각 정당과 대선주자들은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수많은 장밋빛 공약을 쏟아내고 있다. 이명박·박근혜정부 9년 동안 망가진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고 노동자와 서민들의 삶을 보듬어 안겠다는 공약들이 대다수다. 하지만 대선을 코앞에 둔 국민들의 마음은 기대와 불안이 교차한다. 미국의 보호무역주의, 사드 배치를 둘러싼 한중 갈등, 5%의 높은 실업률, 1344조원에 달하는 가계부채, 비정규직의 확산 및 차별 등 어느 것 하나 만만치 않는 난제들이 우리 앞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성장률 둔화와 구조조정에 따른 대량실업, 저임금 노동자들의 생활고는 무엇보다 먼저 풀어야 할 으뜸 과제이다. 3만명이 사업장을 떠난 조선산업, 한진해운 파산과 개성공단 폐쇄에 따른 대량 실업, 희망퇴직으로 포장된 ‘찍퇴’(찍어서 퇴직)가 기업 구조조정의 실상이다. 쫓겨난 회사 밖은 지옥이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의 일터도 전쟁터다. “작년은 전쟁이었어요. 한 차례 폭격기가 쓸고 지나간 느낌이죠. 새해요? 이젠 폭격기가 아니라 핵폭탄이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되네요. 웃으면서 견디려고요. 웃지 않았으면 다 미쳐버렸을 거예요. 아마.” 살아남은 조선업 사무직 노동자의 씁쓸한 고백이다.
 
저임금 노동의 확산도 임계점을 넘어섰다. 보건복지부가 발간한 ‘통계로 보는 사회보장 2016’을 보면, 2014년 기준 우리나라의 저임금 노동자(중위 임금의 3분의 2 이하)는 23.7%다. 2014년 기준으로 시간당 임금이 6712원(월 임금 환산하면 약 140만원)에 못 미치는 경우를 말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아일랜드와 미국에 이어 세 번째로 높다. 저임금 노동자의 비중이 높을수록 노동시장 불평등뿐 아니라 근로빈곤에 빠질 가능성도 높다. 더 심각한 것은 전체 저임금 노동자의 비중이 10년전 인 2004년(24.2%)보다 0.5%포인트 감소하는데 그쳤다는 사실이다. 유통업체 마트노동자는 말한다. “일급 4만4800원으로 한 달에 100만 원이 조금 넘는 월급을 받아요. 이 중 생필품 장만과 공과금, 통신비, 월세 등을 제외하면 아무리 아껴도 20여만원 정도가 남는데 이 돈으로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버거울 뿐 아니라 자기계발은 꿈이죠. 누군가를 만나 교제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지 매일 나 자신에 물어요.”
 
친재벌 대기업 정책과 노동시장 유연화의 결과는 사회 불평등 심화와 비정규 노동의 양산이었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1992년 미국 대선의 구호가 19대 한국 대선의 시대정신이 될 가능성이 크다. 정치 민주주의를 지켰던 촛불광장의 목소리는 이제 공정사회와 재벌 개혁, 저임금 노동의 일소를 요구한다. 경제 패러다임을 바꿔낼 정권교체가 꼭 필요하다. 아니 정권교체와 함께 정치세력 교체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노동 현장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기 위한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 출발은 국제노동기구(ILO)의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에 관한 협약(제87호)과 단결권 및 단체교섭권에 관한 협약(제98호)의 비준이다. 모범사용자(model employer)로서 전교조와 공무원노조를 합법화시켜야 한다. 근로감독과 처벌을 강화하여 1조4000억여원의 임금체불액을 당장 해결해야 한다. 장시간 노동체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주당 68시간 노동이 가능하다는 어처구니없는 행정지침부터 폐기해야 한다.
 
정부가 고용노사관계의 중립적 심판자의 위상을 공고히 할 때 노사 자율의 노사관계를 만들 수 있다. 전경련은 해산하고 경총은 노사관계의 핵심 당사자로 당당히 나서야 한다. 이제 대기업들도 정부 뒤에 숨어 노사관계를 조정하는 구시대의 행태를 중단해야 한다. 인건비 따먹기에 골몰하는 ‘무능한 자본’이 만든 한국은 하청·외주·용역 등 비정규직이 지옥인 세상이다. 불공정 거래관계와 골목상권 파괴는 저임금 노동 확산의 주범이다.
 
노동의 책임도 비껴나기 힘들다. 30년 전 1987년 한국의 노동조합운동은 노조는 민주화했지만, 노동의 계급적 단결과 연대는 여전히 풀지 못한 숙제이다. 정규직·대기업·남성 중심의 노동운동이 기업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기업별 임금 인상과 복지에 매달릴수록 노동시장 내 이중구조는 고착화한다. 노동조합이 국가 차원의 복지와 사회적 임금을 쟁취할 수 있는 연대전략을 추구해야 한다. 연대의 정신이 사라져 버린 노동조합은 그야말로 노동운동의 무덤일 뿐이다. 박근혜 이후, 새로운 세상 건설은 노동의 혁신에서 시작될 수 있다.
 
* 이 칼럼은 뉴스토마토에 기고한 것으로, 3월 22일자 신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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